전라도의 한과 분노
-- 강인한(姜寅翰)의 '전라도여,전라도여'를 중심으로
장 석 주(張錫周·시인, 평론가)
1
헬무트 쿤(Helmut Kuhn)의 「인간의 역사로서의 예술의 역사」라는 글에 의하면 예술가가 산출해 내는 작품이란 <초시간적인 것이 시간화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그 시대의 통역자이며, 그 시대의 증명>의 성격을 띄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어떤 민족이나 어떤 문화의 정과 감각이 그 삶의 어떤 순간순간에 되비치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따라서 예술사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 속에 엉켜 있는 인간이 피부로 느낀 것, 생각한 것, 마음으로 느낀 것>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한국의 시인 강인한의 작품 「전라도여, 전라도여」를 읽게 될 때에도 확인하게 되는 예술의 본질이다. 강인한의 「전라도여, 전라도여」는 그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전라도라는 특정 지역 거주민들의 삶의 역사 속에 엉켜 있는,그 지역 거주민들의 삶의 심층에 내재화되어 있는 쿤의 표현대로 피부로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낀 것 <정과 감각>의 시적 표출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라도여, 전라도여」에서 노래되고 있는 세계를 전라도 지방 거주민들의 정과 감각만으로 한정시켜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언제나 훌륭한 예술이란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한계를 벗어나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법이다. 따라서 강인한이 노래하고 있는 전라도의 한과 노여움과 시름의 세계는 전라도의 삶의 심층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전라도의 정서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전라도와 같은 억눌리고 짓밟힌 삶을 살아온 보편적 다수의 한과 시름을 표상하는 더 넓은 세계의 보편적 정서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글은 강인한의 전체의 작품을 분석한 작가론이 아니다. 다만 이 글은 「전라도여, 전라도여」라는 한 작품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하여, 한국의 수난의 근대사 속에서 질곡의 삶을 영위해 온 전라도 사람들의 결속에 그것들이 어떤 색깔의 정과 감각으로 무늬져 있으며, 시인은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시켰는가를 살피고, 또한 그의 작품의 전체적 성격을 측면에서나마 조명해 보려는 소박한 의도만을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2
거덜이 난 고향,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유창한 서울말을 구사하러
친구는 서울로 가버렸지.
컬컬한 막걸리를 버리고
드는 낫을 버리고 친구는
도시로 나가 운전을 배우고 맥주도 홀짝이고
그리고는 택시 운전수가 되었지.
월남에 가서 아슬아슬한 목숨을 달랑이며
친구는 달러에 맛을 들이곤
변해버렸지.
거덜이 난 고향,
사우디 아라비아로 더러는 아주아주 멀리
서독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버리고
전라도는 누가 지키나.
차마 못 버리는 에미 애비의 땅에 서서
한 그릇 찬밥 덩이 앞에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비굴을 배우고
양심 같은 맹물을 마시며
불러볼 노래도 없이
고개를 수그리네,
전라도여, 전라도여.
인용된 위의 시는 「전라도여, 전라도여」의 도입부이다. 「전라도여, 전라도여」는 일련 번호를 붙여 모두 여섯 부분으로 분절되어 있는 시이다. 이 시는 전라도가 <거덜이 난 고향>이라는 시인의 단호한 가치판단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절대적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지난 60년대, 혹은 근대화라는 거센 변혁의 물결과 함께 표면에 노출되어 있던 가난이 삶의 표면에서 차츰 안으로 내재화되고 상대적 문제로 변질되었던 70년대의 한국 사회 현실 속에서 농촌이 차지하고 있던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한국의 농촌 현실이 한국 근대사의 경과 속에서만 국한시켜 살펴보더라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늘 <희생의 장>으로 존재해 왔었던 점을 상기해 보면, 그것을 시적 소재로 선택한 강인한의 시적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어렵지 않게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한국 농촌 현실의 역사적 경과를 짧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강인한의 시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대한 참조의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농촌 현실은, 일제하에서의 지주의 수탈과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이라는 이중의 수탈 속에서 억압당하고 훼손 당하는 과정과 6.25 이후 미국의 다량의 잉여농산물의 도입 ― 이것을 부연해서 설명하면 1955년 한미 잉여농산물 협정에 의한 이른바 PL 480호의 미국 잉여농산물의 장기적 도입은, 과다 도입→가격 저하→생산 의욕 감퇴→도입량의 증대라는 악순환의 계속을 초래했던 것이다. ― 으로 파생된 식량 공급의 만성적 과다 상태와 그 결과로 빚어진 농업 조건의 지속적 열악화, 그리고 5.16 주체세력에 의한 제3공화국의 등장과 그들에 의해 추진된 경제개발계획, 즉 공업 우선의 경제 정책으로 인한 농촌의 불균형한 성장의 강요와 수출 일변도 경제 정책에서 발생된 모든 불이익을, 저곡가 정책과 같은 파행적인 행정력의 행사로 농민들에게 전가시켜 왔었다는 사실들을 상기해 보면, 한국 농촌 현실이 황폐화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당위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농촌에 대한 일방적인 희생의 강요라는 파행적인 행정력의 행사는 한국 농촌 현실의 장기적 황폐화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이런 저간의 사정이 농촌의 젊은 사람들을 <컬컬한 막걸리>와 <드는 낫>을 버리고, 도시로 나가 택시 운전수가 되게 하거나, 전쟁터로 내몰았거나, 그것도 사우디 아라비아, 서독, 미국과 같은 먼 나라로 취업이나 이민 등의 방법을 통하여 농촌 현실을 떠나게 부추겼던 것이다. 그래서 전라도는 양질의 노동력을 상실하고 피폐화된 채로 방기된 <거덜이 난 고향>이고, <불러볼 노래도 없이/ 고개를 수그리>게 하는 절망과 불행이 악순환되는 땅이다.
3
이 나라의 가장 후진 사람들의 눈물이
모여 흐르는 곳
백 년을 질척이는 갯땅이여, 오 갯땅이여.
무너질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땅에서
나는 차라리 무너지고 싶구나.
아편꽃 빠알갛게 타는 백제의 해를 보며
황해로 지는 해를 보며
오월에 나는 무너지고 싶구나.
할머니는
정화수를 떠놓고 신새벽에 빌었지.
구리 궤짝 속에 엽전 꾸러미 시퍼렇게 녹이 슬도록
빌고 빌었지.
갑오년 난리 속을 뛰쳐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지.
고부 두승에 봉화가 오르고
갈재 갓바우에 봉화가 오르고
무돌에도 계룡에도 봉화가 오르고
휘황히 빛나는 함성 소리에 귀가 먹어
할머니는 귀머거리가 되었지.
황토마루 슬픈 파랑새 울음
할머니는 이냥도 귀머거리.
새야 새야
울지 마라.
위의 시는 「전라도여, 전라도여」의 두 번째 부분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라도는 역사적으로 늘 불이익과 희생을 강요당한 농촌 현실 속에서의 억압과 수탈의 삶을 상징한다. 전라도는 그래서 <이 나라의 가장 후진 사람들의 눈물이/ 모여 흐르는 곳>이고, <백 년을 질척이는 갯땅>이다. <무너질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전라도에 대한 외세의 수탈과 억압은 농촌 현실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초토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여기에 경제 발전 ― 공업화의 등식 논리에서 추진된 60·70년대의 파행적인 경제 정책으로 말미암은 농업 부문의 소외와, 그 결과로 누적되게 된 희생과 불이익은 더욱 더 농촌 현실의 붕괴와 해체를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진행 과정에서 늘 소외와 희생의 삶을 강요당해 왔던 농민들의 한과 노여움과 분노의 응어리는 <아편꽃 빠알갛게 타는 백제의 해>의 이미지에 의하여 강렬하게 형상화되며, 그 수난의 삶에 대한 심정적 반응이 결국 <무너지고 싶다>는 자폭의 심경에까지 연결됨으로써 비극의 의미를 더 넓고 깊게 증폭시키고, 시의 분위기를 비장하게 만들고 있다. 이 수난의 삶이 멀리로는 백제 시대까지, 가까이로는 <갑오년 난리 속을 뛰쳐나간 할아버지>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신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기원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통하여 그것이 간접적으로 3대에 걸친 것임을 보여준다. 할머니는 <고부 두승에 봉화가 오르고/ 무돌에도 계룡에도 봉화가 오를> 때 귀머거리가 되어 <이냥도 귀머거리>인 불구의 삶을 살고 있다. 그 훼손된 삶이 빚어내는 설움은 <황토마루 슬픈 파랑새 울음>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전이되어 표출되고 있다.
4
아버지가 끄을려 가고 있었지.
먼 데 개 짖는 소리 속으로
그 어둠 속으로 아버지는 끄을려 가고 있었지.
우리사 아무 죄도 없응게,
걱정 마라, 후딱 오마.
어머니는 행주치마로 우리를 포옥 감싸고
울고 있었지.
총 소리, 폭격 소리에
돌담 위의 호박 잎새 숨죽이는 여름날
강변엔 뙤약볕만 먹고 자란 뱀딸기
핏빛으로 핏빛으로 익고 있었지.
전라도여, 전라도여
발길질에 채이고 피 흘리다가
밤을 도와 달아나온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까칠한 턱수염
내 뺨은 비비고 부르르 떨리더니
먼데서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귀신들 도깨비들, 수지니 날찌니
해동청 보라매 훠이훠이 다 날아가 버리고
개 짖는 소리 데불고
밤늦은 길을 이제는 네가 돌아가네.
시들은 바람 속을 내가 돌아가네.
위의 시는 「전라도여, 전라도여」의 세 번째 부분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어둠 속으로 끄을려 가고> 있는 아버지와 <행주치마로 우리를 포옥 감싸고 울고> 있는 우리 어머니를 통하여 2대째 삶의 수난을 묘사한다. 6.25라는 외래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빚어진 동족 간의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적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아버지 시대의 수난과 시련의 삶은, 총 소리와 폭격 소리 요란한 속에서 <뙤약볕만 먹고 자란 뱀딸기/ 핏빛으로 익고> 있다는 객관적 현상 묘사로 전치되어 표현된다. 이때 뙤약볕을 먹고 핏빛으로 익은 뱀딸기는, 계속된 수난의 집적으로 응혈된 민중적 삶의 표상으로 읽을 수 있으며, 동시에 이성을 잃어버린 미친 역사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인내하며 삶의 내적 충실의 계기를 마련하는, 민중들의 삶에의 능동적 의지와 슬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서 <발길질에 채이고 피 흘리다가/ 밤을 도와 달아나온> 아버지와 전라도를 수평적인 의미선상에서 호격으로 동일화시킴으로, 미친 역사가 강요했던 수난과 시련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범개인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 수난과 시련이 즉자적인 상태로 내면화되어 응어리진 한과 분노의 정서를 개인사적 정서에서 공동체적 정서에로 그 의미 영역을 확대시키게 된다. 또한 <밤늦은 길을 이제는 내가 돌아가네>라는 마지막 부분의 구절을 통하여 그 수난의 삶 ― 밤늦은 길이 암시하고 있는 삶의 형편과 조건의 험악스러움을 환기하기 바란다 ― 이 3대인 화자에게까지도 계속될 것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5
시름 많은 사람들의 흥얼거림
저 바람 속에 들리는 것을.
설움빛까지 드러난 황토 흙에 부리를 씻고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열 굽이 스무 굽이
바람도 목이 쉬고
검게 탄 바윗돌이 울먹이는 산마루
철쭉꽃 같은 철쭉꽃 같은
봉화가 오른다.
한 무더기 철쭉곷이 타오른다.
북 소리, 고함 소리
관솔불 높이 이글거리는 밤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녹두꽃 흐드기는
샛바람을 따라 새털구름을 따라
짚신발로 뛰어가던 황톳길
할아버지 죽창 들고 거꾸러진 벌판,
나이 어린 빨치산이 부르튼 발을 안고
숨 거둔 골짜기,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강인한의 시적 공간을 물들이고 있는 것은 핏빛이다. 이를테면 그의 시 세게에 자주 등장하는 횃불·황토 흙·철쭉꽃·뱀딸기·노을 등의 색깔들은 모두 핏빛이거니와 핏빛과 동색의 계열에 드는 것들이다. 핏빛은 수난과 분노의 색깔이다. 또한 그것은 슬픔과 결핍의 세월에 노여움과 분노로 응혈된 심정이 의식의 바깥으로 배어나오는 한의 색깔이다. 그것이 「전라도여, 전라도여」에서 전라도라는 직접적인 지명과 관련을 가짐으로써 전라도라는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양상의 비극성과 한스러움으로 연계된다.
그것은 위의 시에서 매연의 끝마다 반복되는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라는 정언적 명령과 <핏빛>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통하여 강인한의 시적 세계의 비극적 울림으로 더욱 증폭된다. 이 비극성의 안쪽에는 <철쭉꽃 같은/ 봉화가 오르>던 시절이 감추어져 있고 또한 전라도가 <할아버지 죽창을 들고 거꾸러진 벌판>과 <나이 어린 빨치산이 부르튼 발을 안고/ 숨을 거둔 골짜기>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의 지각 변동에 의하여 희생당한 사람들의 말없는 슬픔과 한스러움을 끌어안고 있는 땅이라는 인식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황토 흙에 부리를 씻고, 새는 울어야 하는 것이다.
6
산 적적, 흰 그리메
불 같은 그리움을 다스려
칡넌출 벋어간 곳,
전주에서 솜리까지 밤길 칠십 리
칼날 선 내무서원 눈길을 피해
달아나온 아버지의 맨발
삼베 잠뱅이, 거뭇한 수염 그리워.
지금은 비어 있는 마을
젊은 놈들은 도시로 가고
잘난 놈들은 돈벌러 가고
약은 놈들은 등을 치러 가고
쑥떡만 남아서 지키는 고향.
웃으면 눈이 이쁜 가시내들
과자 공장으로 다방으로 술집으로
더러는 밑천도 팔러 다 떠나가 버리고
비어 있는 마을에 햇살은 고와
어어이 부르면
어어이 뒷소리로 넘기던 모내기는 누가 하나.
전라도여, 전라도여.
만세만세, 만세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던 할머니의 삼월도 가고
사월도 가고
슬픈 오월 하늘.
위의 시의 묘사처럼 전라도는 비어 있다. 이것은 60·70년대의 한국 농촌에서 일어난 이농 현상의 결과이다. 이농 현상은 60·70년대의 수출 주도형 공업화·도시화의 무리한 추진 과정에서 채택된 저곡가 정책과, 그 결과적 산물로 주어진 농촌 경제의 심각한 위축과 초토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한국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 누적된 농촌 현실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불평등은 농촌의 젊은 남녀들을 도시로 내모는 결과로 연결된다. 그래서 전라도는 <젊은 놈들은 도시로 가고/ 잘난 놈들은 돈벌러 가고/ 쑥떡만 남아서 지키는 고향>이다. 이것은 농촌의 젊은 남녀들의 도시 진출이 경제적·사회적 지위 상승 욕구에 의한 것임을 입증한다. 이농 현상은 농촌 경제의 악화와 농촌의 전통적인 생활 문화의 파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어어이 부르면/ 어어이 뒷소리로 넘기던 모내기는 누가 하나/ 전라도여, 전라도여.>라는 안타까운 탄식의 배후에는, 화자의 힘으로써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과 공동체적 삶의 바탕이 붕괴되는 것에 대한 자기 연민의 슬픔이 잠복해 있다. 여기까지 이르면, 「전라도여, 전라도여」에서 노래되고 있는 정서가 한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이미 집단의 보편적 체험사와 접맥된 정서의 차원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7
발치에 섬진, 영산강을 두고
제 설움에 돌아눕는 만경, 금강을 다둑이고
크막하게 갈재가 뻗쳐
솟은 재를 넘는 옛날도 옛날
소금 장수 시드러진 가락에
무더기 무더기 찔레꽃도 피고
산도둑놈 거친 숨소리에
소쩍 소쩍 새도 울어라.
달하
먼 발치로 내다보고 섰는
혼곤한 꿈빛의 고향이여.
이 나라의 가장 후진 백성들의 한숨이
모여서 삭는 곳
오늘도 질척이는 갯땅, 오 갯땅이여.
한 그릇 찬밥 덩이 앞에들 놓고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들고
그래도 남은 사람들끼리
꿀꺽꿀꺽 돌려 마시는 한 사발의 찬물
시리고 아픈 이 나라의 어금니여.
강인한의 「전라도여, 전라도여」는 농민의 수난으로 점철된 근대사 속의 삶에 대한 범상치 않은 관찰을 통하여, 그 내면에 응어리져 있는 한과 노여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라도가 농업의 땅이고, 농민들의 삶의 현장이며 근거라는 사실은, 한국인이 본디 전통적인 농경민족이라는 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넓은 시각에서 보면 전라도가 다름아닌 우리의 원래의 고향이라는 의미를 껴안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전라도에 대한 파괴 행위는 우리의 고향에 대한 파괴 행위이며, 그것은 또한 <고향이란 우리에게 행복의 원형을 의미한다.>라는 김우창(金禹昌)의 말을 반성 없이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행복의 원형에 대한 파괴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도 전라도를 무더기무더기 찔레꽃도 피고, 소쩍소쩍 새도 한가로이 우는 <먼 발치로 내다보고 섰는/ 혼곤한 꿈빛의 고향>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전라도라는 우리 삶의 현실이 그 근원적인 전체성, 즉 조화와 통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밖에서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적인 힘에 의하여 내적·외적 질서가 파괴되고 있다는 현실 인식은 전라도가 힘없고 나약한 백성들의 한숨이 모이는 곳이며, 오늘도 질척이는 갯땅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전라도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적 시선은 마침내 전라도는 <시리고 아픈 이 나라의 어금니>라는 최종적 결론에 유도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강인한의 「전라도여, 전라도여」라는 한 작품을 한국 근대사의 흐름이라는 사회학적 틀에 비추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강인한의 작품이 범상한 수준의 성공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전라도적 현실의 피폐화를 조장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적 삶의 양식의 변화가 소망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진전되도록 부추기는 비윤리적 힘들과 요소들의 심층적 얽힘의 양상과 계기들에 대한 깊은 성찰의 뒷받침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인한은 이 작품에만 국한시켜 볼 때 은폐되어 있는 시대의 진실을 문학적 차원으로 이끌어내어 정치하게 개진하는 '시대의 통역자'가 아니라 '범상한 관찰자'의 수준에만 머무른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본다. 시인이 현실에 대한 도식적 관찰자로 남게 될 때 시에 형상화되는 현실의 문제도 도식적 관찰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앞으로 우리는 강인한이 전라도적 삶의 의미에 대한 더 깊은 천착을 통하여 「전라도여, 전라도여」에서 탐구된 핏빛이라는 이미지가 그 이면에 거느리고 있는 의미망을 역사적 지평이라는 보다 거시적인 틀에 비추어 넓고 깊게, 그리고 정치하게 탐구됨으로써 「전라도여, 전라도여」에서의 범상한 성공을 훨씬 능가하는 탁월한 시적 성과로 이어질 것을 간절히 기대한다.
'문학 참고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독자들이여 베스트셀러 아닌 진짜 시를 만나라 / 신경림 (0) | 2014.10.09 |
|---|---|
| 옹이가 있던 자리 - 치밀한 구도의 시 /강인한 (0) | 2014.10.09 |
| 파라독스와 위트가 넘치는 시 /강인한 (0) | 2014.10.08 |
| 시 창작이란 무엇인가 / 김기택 (시인) (0) | 2014.10.08 |
| 극사실주의의 감각적 표현 - 후회의 방식 (0) | 2014.10.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