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안시아
노인과 수레
노인은 내리막길처럼 몸을 접는다
밤새 쌓인 어둠을 수거하고
수레 위 차곡차곡 재활용 상자를 쌓고 있다
상자마다 뚜렷이 접힌 흔적들
그 角이 포개져 품을 만든다
바퀴가 회전할 때마다
노인의 야윈 마디가 함께 맞물려 삐꺽거린다
어떤 세월이 구부러진 角을 만든 것일까
곧게 내리던 하얀 눈들도 굽은 등위에서
한번 더 미끄러지고 있다
구부러진 길이 골목을 품듯,
노인은 점점 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수레 위 차곡차곡 접힌 生이 묵직하다
헉, 헉 뜨거운 입김이 골목을 큰길로 끌어내고 있다
품 가득 곧, 햇살이 안겨올 것이다
골목을 다 빠져나올 무렵
축이 닳은 바퀴가 성급히 회전을 한다
끌어온 길을 축으로 힘껏 잡아당길 차례다
노인은 마지막 角을 그려내고 있다
석모도 민박집
바다에 꼬박꼬박 월세를 낸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나눠줄 광고지 한켠
초상권을 사용해도 된다는 계약조건이다
인적 드문 초겨울 바닷가,
바다는 세를 내릴 기미가 없고
민박집 주인은 끝물의 단풍처럼 입이 바짝 마른다
알고 보면 어느 것 하나 내 것인 게 없다
슬쩍 들이마신 공기와
내 몫을 챙겨온 하늘
게다가 무단으로 사용한 바람까지
불평 없이 길을 내주는 백사장 위
스물 몇 해 월세가 밀려있는 나는
양심불량 세입자인 셈이다
수평선을 끌어다 안테나를 세운 그 민박집
바다가 종일 상영되는
발이 시린 물새 몇 마리 지루한 듯 채널을 바꾼다
연체료 붙은 고지서처럼 쾡한
석모도 민박집에서
내 추억은 몇 번이나 기한을 넘겼을까
바닷가 먼지 자욱한 툇마루엔
수금하러 밀려온 파도만 가끔 걸터앉는다
새우탕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 부분까지 끓는물을 붓는다 오랜 기간 썰물이던 바다, 말라붙은 해초가 머리를 풀어헤친다 건조된 시간이 다시 출렁거린다 새우는 오랜만에 휜 허리를 편다 윤기가 흐른다 순식간에 만조가 되면 삼분만에 펼쳐지는 즉석바다, 분말스프가 노을빛으로 퍼진다 그 날도 그랬지 끓는점에 도달하던 마지막 1°는 네가 이유였다 주의사항을 무시한 채 추억의 수위는 수평선을 넘나들고 앗, 끓는 바다를 맨 입술로 그 날의 너처럼 빨아들인다 그 날도 노을빛이 퍼졌다 그 흔적, 바다가 몰래 훔쳐보았다 그 바다에 추억을 데이고, 입안이 까실하다 텅 빈 용기 안, 수평선이 그을려 있다
비 갠 후
나무는 뿌리로 받아 적는다
흙은 오래된 공책
땅벌레 자음모음으로 기어다니고
나무는 밑줄 그어 길을 만든다
우리가 밟고 지나는 수많은 문장 아래
더 많은 길이 있다
보도 위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조차,
모든 것이 길이다 하늘이 요약된
흙은, 오랜 시간 읽혀왔으리
나무가 미처 쓰지 못한 말들 낙엽으로 뒹굴고
바람이 책장을 넘기면
햇살이 제일 먼저 다가와 읽는다
비 갠 후, 길은 제 몸 위에
필독해야할 거대한 책 한 권,
여러 갈래로 터 놓는다
콘택트렌즈
용기 안에 가득 찬 海水, 매일 밤 그 위에 범선 한 척 띄워놓는다. 내 몸에서 빠져 나온 순간 두 눈을 부릅뜬다. 수면 위에 띄우자마자 돛을 올리는, 그 안에 바다가 굴절되어 들어있다. 코를 박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물고기 떼가 스쳐 지나갈 것만 같다. 한 번도 감아보지 못한 눈, 내가 재우지 못한 또 하나의 밤이다. 그렇게 밤하늘은 깜깜하게 닫힌 뚜껑이리라. 화장실 한켠 나를 교정해온 바다, 내 안으로 간간한 밀물이 밀려온다. 눈물은 오랜 항해기간동안의 방부제였을까. 내 눈은 아직 수평선을 읽지 못하고 미라처럼 건조하다. 海水 위 범선 한 척 손가락 끝으로 들어올린다. 밀착시킨 간격사이로 바닷물이 흐른다. 간밤의 항해가 너무 길었던 탓인지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다.
▒ 심사평
조창환: 안정된 시적 형상력
안시아의 [노인과 수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대상을 대하는 시인의 시선이 차분한 내성적 톤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동정과 공감에 바탕을 둔 인간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감정을 제어하는 이지적 힘과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균형과 긴장을 이루고 있다 이 시는 <풍경의 정서화>라고 할만한 시적 형상력의 수준에 이르렀다. 시의 처음과 끝에 보이는 독특한 언어감각 또한 주목할만한다. 이 정도의 개성적인 표현력을 지녔다는 것은 상당한 습작의 과정을 거쳤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함께 응모한 다른 시들도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당선작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한영옥: 개성있는 시선과 신선한 감각의 어울림이 돋보여
당선된 안시아의 작품들은 오랜 습작의 여유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노인과 수레]에서 와 같은 예리한 관찰력과 관찰을 받아내는 언어감각이 곳곳에서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비 갠 후]에서의 상상력은 독특하고 신선했다. 비 갠 후의 풍경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치환하여 읽는 재치가 오래 눈길을 끌었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대상을 그려주려는 의지와 표현의 신선감이 작품 곳곳에서 두드러져 보였다.
이남호: 섬세한 언어의 무늬들과 상상력의 힘
안시아씨의 시들은 그 상상력이 흥미롭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상상력의 힘으로 재구성하는 솜씨를 보여준다. 그리고 관찰력이 뛰어나다. [새우탕]이나 [콘택트렌즈]같은 작품은 프랑시스 퐁쥬의 시처럼 사물을 낯설게, 치밀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눈을 확인시켜준다. 그러한 상상력을 한층 더 밀고 나가기를 바란다.
▒『현대시학』4월호, 신인상 당선소감
바다는 주기적으로 나를 수배했다. 움푹 파인 모래가 발목을 꽉 죄어오면 꼼짝없이 모든 걸 자백하곤 했다. 그렇게 털어놓곤 하면서 힘겹게 세상과 화해하며 살았다. 세상은 그렇듯 나에게 항상 토라져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바다가 던진 부메랑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메랑은 오스트리아의 원주민들이 사용한 무기의 종류인데, 목표물을 맞추지 못했을 때 다시 되돌아온다고 한다. 그렇듯 나는 항상 목표물을 관통하지 못한 채 작년을 마지막으로 20대를 떠나 보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목표물은 바로 내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 바다는 빈털털이인 나를 그렇게도 수배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부메랑으로 던져지고 싶다 그리고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바다에 가는 것이다.
숱하게 상처받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좀처럼 상처받지 않거나 쉽게 아물던 환부들, 모조리 詩로 남기기 위해 그 자리들을 덧나게 하고 싶다. 그 상처들이 꽃으로 피어나 아름다운 꽃말을 가질 때까지 끝없이 뜨거운 수액을 끌어올리고 싶다.
항상 따끔하게 충고해 주신 시산맥 시인님들과 그리고 몇 해 전, 더듬대던 나의 손을 처음 잡아주시며 나를 예까지 이끌어주신 윤성택 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후원자인 남편과 시부모님, 그리고 올해로 아흔 둘이신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 순조 오빠, 그리고 항상 격려해준 사랑스런 친구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항상 노력하는 모습과 좋은 시로 보답할 것을 약속드린다.
안시아 시인
본명 : 안현나
1974년 서울출생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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