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서정시학》신인상 당선작 _ 지정애, 이은수
마흔여섯 채의 슬픔 / 지정애
너는 매일 천 개의 밤을 건너고
나는 매일 천 개의 해를 찾아다니느라 발이 부었다
너 떠나고 난 뒤
첫서리 같은 난데없는 한기가 나를 덮쳐오는 동안
나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지난날들의 고혹과 병증을 어루만진다
텅 빈 얼굴 속의 바싹 마른 입술과 입술이 만나
생의 바닥을 적셨던 날들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복사꽃빛 한 마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내 전부를 네게 들이밀면
네 뼛속 살 속에 맺혀 있을 이슬방울이 내 머리카락을 축이고
네 전부를 껴안으면
삭정이같이 삭은 어깨에서 제비꽃 피어난다
네가 천 개의 밤을 건너는 동안
나는 들길의 풋순 같이 쑥쑥 자랐다
네가 건네어 온 한 줌의 온기에
천 년 전의 소식 같은
마른 얼굴을 다시 보며,
네가 첫봄처럼 내게 오던 날을 생각한다
보아라, 손 없이 손잡는 저 꽃들, 풀들
저 여린 것이 끝내 열매가 되는 순서를
아가의 숨결같이 피어나는 너를 바라보며
나 이제 이 세상에 없는 마음의
집 한 채 짓고
그 고요 속 소슬한 난간에
나를 눕힌다
던킨 도너츠 / 지정애
당신, 던킨 도너츠 먹을 땐 주의하세요
초코렛 듬뿍 발린 던킨 도너츠 한 개
섬벅 베어 먹는 순간
유형의 시절 당신을 물어뜯기만 했던 잔혹한 사랑이
입 속으로 확 들어 올 거예요
오래 낯설었던 입김이 당신의 혀를 덮치는 순간 우우,
아무 말도 못하네요, 당신
끝까지 당신을 갉아 먹으면서
기차를 타고 가버린 사랑, 이젠 입 속에서 꼼짝 못할 거예요
그 병신 같은 사랑을 뒤늦게라도 우적우적 씹어 보세요
오래된 사랑의 먼 냄새에 뒷덜미 잡히지 말고
입 안 가득 차오르는 복수의 붉은 향기에 쾌재를 부르세요
잠깐, 입 속에서 녹아 흐르는 그 입술에
당신은 또 몽롱히 빨려들어갈지도 모르겠네요
기차는 떠나고 장미는 지고
꽃 진 자리 흉터는 감미로워
당신의 혀가 날름거릴지도 몰라요
있는 듯 없는 듯 가라앉아 있던 흉터가
푹 꺼진 눈 허기진 배 보이며
당신에게 달려 들 거예요
던킨 도너츠 먹을 땐 정신을 바짝 차리세요
유효기간 지나간 사랑에 먹혀버릴지도 모르니까요
분홍고래 / 지정애
분홍색으로 바디페인팅 된 이삿짐차
푹 꺼진 배 밀며 들이닥친다
수십 개 박스로 요약된
수년 간 살림들
마구 삼켜 불룩해진 분홍고래
꽃미남 캐릭터 그려진 꼬리지느러미
살짝 들어 올려 물살 가르며 달린다
늘 드나들던
빵집과 서점을 지나고 김밥나라 지나
하늘 닿은 고가도로 휘익 내려와
여의도 마천루 꼿꼿이 지날 때
세 평 방 열대야와 밤새 싸우던 선풍기
사이다 맛 한강 바람에 다시 돌아가고
덜거덕거리는 서랍은 분홍고래 수염 잡고 바둥거린다
모두 다 포장하는 시대에 누드가 되어도 즐거운 건
한 번씩 솟구칠 때마다 보이는
먼 수평선 때문
고단한 세간들 모처럼 하늘 보며 꿈꾸는 시간
지느러미 살랑이며
신림동 고불고불 들어서니
어정거리던 은빛 물고기들 슬슬 피하고
소라기둥 앞에 멈춘다
지끈거리는 두통 바람에 날려 보낸 육법전서들
햇빛 아래 어깨 들썩인다
후줄근한 살림 갈피갈피 푸우
숨 불어넣으며 배 꺼지는 분홍고래
고래와 분홍신 / 지정애
목조 교실 흐릿한 창문 너머 있는 ‘분홍신’에 얼굴 박고 여러 날 서성이곤 했던 적 있어요 꿈결에 언뜻 비치기도 하다가, 출근하는 당신의 손바닥에 ‘동화책’이라고 아침마다 비뚤비뚤 새겨 넣었지요 저 너머 있을 눈부신 에메랄드빛 바다를 몇 개라도 건너고, 구름국화 넘실거리는 산언덕에서 하늘에 폴짝 뛰어올라 높이 높이 날고 싶었지요
두근거리는 아홉 살 맨발은 햇살로 엮은 줄넘기 넘으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어스름에게 달음박질하며 갔어요 담장 내다보던 깨금발, 골목길 휘감는 텅 빈 바람 소리 들으며 다락방으로 스르르 들어갔어요
서른일곱 살 당신은 생에 흘러드는 몇 천 볼트의 봄을 움켜잡으며 고래가 되어갔지요 밤낮으로 몸 안에서 출렁이는 붉은 피에 몰려 먼 바다까지 헐떡거리며 떠나가는 당신의 생, 점점 부풀어갔지요 높아져 가는 계단 올라가는 당신의 어깨 불끈 솟구치고, 당신은 점점 가물가물해져 갔어요 커다란 손으로 우리의 바다까지 끌어모아 도시를 가로질러가고 나면, 우린 바짝 마른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점점 커져가는 구두 발자국 소리 들었어요
당신이 뜨거운 지느러미 흔들며
방을 밀고 들어오면
우린 숨소리 죽이며 벽 속에 들어가 잠을 잤어요
수평선 철커덕 닫히는 소리
곤두박질친 별 나뒹구는 소리
꿈결에 들으며
아홉 살 맨발은 누런 이불에 젖은 얼룩 꽃을 피웠어요
당신은 아실까요?
순한 눈망울의 아이가 그렁그렁한 연둣빛 꿈을
닳고 닳은 만화책 갈피 속에 접어 넣으며 잠든 것을
산수유나무 까페 / 지정애
구름이 몰려온다는 예보만 들어도 코에 단내 나는 날
빨간 캡을 쓰고
산수유나무 까페가 문을 여는 숲실마을에 간다
왕산수유나무 삼백 년 묵은 고집이 피우는 향기와
웅숭깊은 그늘 수북한 까페에서
한나절 푸지게 자다 일어나면
엉켰던 길에서 풀잎 같은 새살이 돋을까
끝없는 생을 번져
숲실 마을의 서낭당이 된 산수유
햇빛 한 줌과 노란 그늘이
세상없는 열매 익히는 소리에
고단한 시간 헹구어 낸 사람들,
구름과 바람의 모잘 벗어 던진다
환하게 꽃 핀 얼굴들
노을 진 걸음이 가볍다
까페의 그 많은 의자는 무슨 생각하며 시간 보낼까
앉은 자리마다 고여 있을 먼지와 內傷의 흔적들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리라
산수유나무에 대한 예의로 신은 구두의 먼지가
구름 가루이길 바라는 동안
왕산수유나무 옆에 있던 작은 저수지가 내려왔는지
내 마음 속에서 물살 소리가 난다
■ 지정애 / 안동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대구 성서여자정보고등학교 국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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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게를 먹다 / 이은수
겹겹 옴딱지 펼치자 짜르르 흐트러진 점액 칼날에 생을 들인다
장례 치르는 동안 흐벅진 몸뚱아리, 물소리 그윽하다
흐무러진 바다 이처럼 가깝기에 짓무른 생사가 지척간이냐고,
이 짓거리 뉘게 물으랴
하지만 가깝다고 어이 말하랴
후일 들이닥친 가혹한 닦달질에 자칫 덜컥거리던 호흡 가빠지고,
흐늘흐늘 앓다가 짠한 다툼질 잘 듣겠지
한입 베어 물자 퉁퉁 부은 바다 울컥울컥 헤엄쳐온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베어지고, 구정물 튀기며 흐물흐물한 똥오줌 풍덩
너무 가벼워 무한공간으로 헛되이 자빠지는 빛깔들
울컥 치밀어 오른 뜨거운 덩어리 꿀꺽 되삼켰지
한 점 비린내 돌돌 말아 쥐고 늘어져 간다
바다 챙겨 밀봉한 껍질 바짝 다가온다 문득 무섭고 낯설다, 물을 내리쳤다
겨누는 것은 희뿌연 생을 건너는 것, 누르듯 늘 절박함으로 다가오고
번식과 이동을 반복해 들러붙는 바다 쉼 없이 버둥댄다
인큐베이터 속을 걷다 / 이은수
햇볕 빼곡이 나붙은 길 막막히 망설이다 들어선 마지막 거처쯤일,
방값 선불로 떼어주고 핏물 막 훔친 수술대 위에 올라 울컥 쏟아낸 한 호흡
유리그릇에 면도칼 자국 따라 대롱거리던 꼬리 낙하한다
물소리 반죽해 담뿍 쥐어짠 핏기,
포대기 삼아 휘감는 시계소리 쩍 벌려 칭얼대고 뒤틀 때마다
팔락이던 호흡 고르지 못해,
시달리는 고열 피범벅 두어 뼘 물큰한 덩어리
부스럼 딱지처럼 엉겨 붙는다
서먹한 움집 흔드는 소리에 악써 지른 비명, 물웅덩이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콜록대는 핏똥 봉우리 삼킨 빛, 아궁이처럼 환하게 산란한다
달을 삶다 / 이은수
짚가리 갈피에 철퍼덕 지붕에서 미끄러진 달 옭아매 달군 가마솥에 풍덩 담그고 막소금 두르고 휘휘 젓는다
솥뚜껑 킁킁대면서 흥건해지면 푹 우려져 곱삶아진 달
한 겹 벗겨낸 물렁한 목덜미 내밀고 느물댄다 씨암탉 담갔다가 건쟈내듯 쿡 찌른 젓가락에 꽂혀 나온 달 반질한 부뚜막에 얹혀놓고 쪼개본다 비린내 콸콸 터뜨리고 어렵사리 기어 나온 질벅한 달무리 닳아빠진 오지항아리굴뚝 쑥 빠져나와
볏집 꿰맨 지붕 위에 박처럼 후딱 매달린다 짓뭉개진 생은 어딘들 있는 법 부릅뜬 눈 어느새 퀭해지고 오줌발은 툭 툭 부러지지
오늘 밤은 힘 쭉 빠진 달
오한 들어 어깻죽지 늘어져 있네
공룡알 화석지 / 이은수
공룡알 화석지는 소금밭이다 해부실습용으로 수입한 거뭇거뭇한 시체처럼 누워 있다 툭툭 걷어채어 튕겨 오른 소금 걷어낸 갯바닥,
푸른빛 도는 소금 으깨져 막 끄집어낸 새우처럼 팔딱팔딱 튄다
구워내려 비행하는 불볕, 공룡알 속으로 날렵한 단검 꽂히듯 덮친다
떼구르르 굴러 첨벙 곤두박질 칠 줄 알았는데
푹 삶겨 지껄이는 것을 보니 너도 날고 싶었구나
돌 층에 꽉 박힌 생, 칼 흔적도 없고 뜯겨지지도 않았다
눈빛 무거워 일어서지 못하고 오줌 지려 축축한 엉덩이 핥고 있던 햇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며 쿨럭쿨럭 프로펠러 달고 날다
폐허에서 흘러나오는 시간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우연한 겹침일까 허벅지 들어낸 어섬, 기름때 절은 경비행기 연습장 활주로
빨아 잔뜩 쥐어짠 광목천 털듯 프로펠러 비행기 쓸리고 있다
겨울 숲 / 이은수
골바람이 참나무가지 뒤흔들면서 올라와
성가신 듯 막무가내로 밀쳐내 숲 소리 만들고
뒤꽁무니 좇던 햇살 빠르게 지워져간다
치달리다가 부닥뜨림은 오히려 실존하고 있음을,
대관령 동쪽 골짜기 갈피 밀생한 숲에 핏발이 돋는다
눈송이 뚝뚝 떨어뜨려 가물가물 먹먹해지는 산길 뒷목
낮술에 벌겋게 취한 낯짝
깍지 낀 손 주무르며 입 딱딱 벌려 살아있음이 죄명이 되냐고,
꽁꽁 언 발톱이 옆구리 벌컥 걷어챈다
꽁꽁 묶인 채 후들거리는 멍
몇 번이나 벌목 탐하고야 잠이 들려나.
낯선 시간 죄다 걷어내 팔면 몇 푼어치나 되겠나
아스라한 어딘가에 걸려 들먹거리는 눈발,
날개 후드득 날아올라
꿀렁꿀렁 바퀴소리 내며 골짜기로 훤하게 내달리고 있다
■ 이은수 / 1957년 수원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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