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최치원신인문학상 당선작_ 권수진/ 붉은 모터사이클 (외4편)
<제6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작>
붉은 모터사이클 외 4편
-체 게바라를 위하여
권 수 진
낙조가 푸른 운판(雲版)을 피로 두들긴다
죽은 자의 이름처럼 꽃무릇이 피어난다
순간 나를 덮치는 검붉은 코피에 놀라
나는 내가 떠나온 별의 주소를 잃어버렸다
혁명의 끝은 갑자기 밀려오는 해무와도 같은 것
이방인의 패스포트에 추방낙인이 찍히고
방랑하는 꿈의 가방이 늙어갔다
만남에 이유가 있었다면 떠날 때는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코뮤니즘 강의실 잎 시든 빈자리는
한치 앞도 더듬을 수 없는 깜깜한 통곡의 벽이었다
운명의 룰렛 방아쇠를 당기지 마라
끊임없이 몸을 뒤척이는 행성처럼
나는 최후의 시간을 위해 손가락뼈를
연필처럼 깎아야했다
흑백으로 남은 쓸쓸한 초상 뒤편으로
날개를 접는 냉전의 시대여
나무 화병에서 시들어버린 꽃은
두 번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
작별은 예고 없이 보여주는 야윈 등짝과 같은 것
인연이 아닌 그 사람은 끝내
총구 속으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었다
이십일 세기에도 혁명은 언제나 미완
분노가 서걱서걱 지나간 마른 사막으로
붉은 모터사이클 한 대 휙 지나간다.
따뜻한 얼음
맑고 투명한 물속으로
누나의 사랑이 풍덩, 빠졌어
5월이라고 했어
첫사랑이 강바닥에 제 몸 드러내기까지
정처 없는 물살처럼 청춘은 흘러갔어
누나는 피를 얼려 사각얼음 만들었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랑 아니었으므로
잡으려면 서로에게 차가운 상처만 주는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어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을 되찾았다고 했어
강 하류의 넓은 폭만큼이나 멀어져버린 거리(距離)
누나는 적당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어
무엇 하나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누나는 5월의 신부가 되었어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누나의 안부는
냉장고 속에 오래 얼음으로 덮여 있었어
저것 봐, 누나의 안경에 서리가 내렸어
누군가 입김 때문이라고 했지만
결빙이 시작된 불안한 살얼음판을 당당하게 걸었던
그때의 발자국 소리 들었어
차가운 왼손에 깍지 낀
오른 손목을 떼어놓지 못했던
온몸에 소름이 돋는 소금바람이 불었어
맞잡은 손처럼 더욱 단단해졌던 그런 얼음을
나는 따뜻한 얼음으로 기록했어.
바닥, 밑바닥
수직의 각도는
0.1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등각(正等覺) 90도
로프 하나에 존재론의 무게를 매달아 놓는다
사람의 발길 닿은 적 없기에
바닥이 되지 못한
미지의 암벽에 최초의 손을 뻗는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으므로
내 몸이 스치는 곳마다 일어서는 수직(垂直)의 길
이 순간 가장 절실한 것은
새끼발가락 하나 딛고 설 수 있는 버팀
깎아지른 듯한 주장자의 벼랑 끝에서는
허공도 지나친 사치가 될 수 있다
임계점(臨界點)을 묻지 마라
바닥을 치기 전까지
절망도 나의 길이다
긴장된 근육으로 세상을 퍼즐 맞추기를 하다
붙잡았던 정답이 으스러질 때 바닥이 있다
가파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쿵-하면서 울려
심장이 바닥까지 출렁거릴 때
거기에 밑바닥이 있다
오르는 동안에는 뒤를 돌아보지 마라
신(神)도 나를 대신해 주지 못하는 순간
나는 가장 깊은 바닥, 밑바닥을 찾아
가장 높은 곳을 기어오른다.
호미에 대한 반역
어머니가 아랫목에 누워 있어
시인을 꿈꾸는 추방자를 낳은 죄로
일찍 몸이 녹슬고 이가 빠졌지.
척추가 휘어질 대로 휘어져버린 몸이
가끔 애벌레처럼 꼬물거렸지
가끔 어머니가 밭에 사는 벌레인 줄 알았어
종신형 수인번호를 달고 살아야 했던 손발이
타인의 삶을 보듯 추했어
아직 주검이 되기 먼 나이
불쌍한 어머니는 또 묵정밭 걱정하지
호미를 달라고 어머니 칭얼거리지
호미가 극약이면 좋겠어
내가 편안히 잠들 수 있는 꿈이면 좋겠어
호미가 나를 따라와 날카롭게 쪼아댔어
나는 자식을 낳지 않을 거야
호미 같은 놈이 아버지, 하며 나를 찌를 거야
밭을 갈아야 했어
그건 어머니를 위한 일이었지만
잡초보다 무, 상추, 오이, 시금치, 쑥갓
남새가 지겨웠어
어머니 자리에 꽃을 심고 싶었어
만화방창한 날에 꽃놀이 가고 싶었어
어머니를 치우자 호미가 나왔어
호미자루가 이미 썩어버렸어
그걸 내력이라 부르기에 너무 진부해
나는 그 호미로 어머니를 갈아엎기 시작했어
나는 나를 가장 많이 닮은 잡초를 위해
김을 매기 시작했어.
반구대 암각화에서
여기에 웬 고래? 디스플러스 담뱃갑에 음영으로 새겨진 고래 한 마리가 있다
진화의 어느 한 시점에서 육지 대신 바다로 갔던 고래의 선택은 현명했다 땅에 남았던 것들 모두 박물관의 화석이 되어버렸다
나는 고래보다 사람을 기다렸다 기다리지 않았기에 고래는 오지 않았지만 기다려도 오지 않을 사람을 위해
고래가 새겨진 담배연기를 가슴 깊숙이 마신다
왜 여기에 고래를 새겨 넣었을까? 그건 차가운 암벽 위에 당신의 침묵에 항의하며 남긴 시퍼런 멍 자국일 것이다
아니면 바위 속에 숨겨진 당신의 윤곽을 캐고 있었을 것이다
한번 어긋난 윤회의 지층은 돌이킬 수 없는 각자의 틈을 이별의 폭처럼 점점 벌려 나갔다
아무래도 밀물이 찾아오면 저 고래잡이배를 타고 바다로 가야겠다 산산 조각난 유리잔의 물결을 헤치고
기다리기엔 나는 이미 지쳤다
불쑥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향유고래가 보고 싶다 당신은 바다를 선택했지만 바다 대신 육지에 남은 것은 나였으므로.
-------------------
권수진 / 1977년 경남 마산 출생. 2006년 경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경남대학교 청년작가아카데미 1기.
[제6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심사평]
최치원신인문학상의 올해 본심 진출자는 권수진의 「붉은 모터사이클」 외 4편, 최주연의 「골목」 외 4편, 신혜정의 「‘사람 되기 프로젝트’에 사용된 함수(函數) 계산 과정」 외 6편, 이정행의 「폐차의 이력」 외 4편, 이정희의 「백설공주와 일곱 친구들 세상에 세 들다」 외 5편, 백지연의 「얼룩고양이 표백법」 외 4편 등 총 여섯 명 33편이었다.
투고작의 수준은 모두 등단자의 수준에 필적하는 것으로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다. 다만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경우가 간혹 있었고 자신의 작품 세계가 지닌 특징이나 장점을 아직은 잘 파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시적 자의식의 측면에서 시적 형식, 어법, 화법 등이 자신의 시적 개성과 어떤 상관성을 지니는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는 투고자 일반에게 모두 해당되는 사항이다.
이정희는 화법이 발랄하고 참신하기는 하나 아직 시적 사유의 깊이가 무르익거나 정리되지 않았다. 백지영의 경우도 발상은 참신하지만 시적 상상력의 자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시가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 신혜정은 시적 개성의 문제가 단순한 차별화의 문제인가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 보면 좋을 듯하다. 기발한 생각이나 상상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 이정행은 안정적인 반면 시의 흡입력이나 참신함이 다소 적다는 느낌을 주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권수진과 최주연 두 사람을 놓고 심사위원 간에 논의를 진행한 결과, 권수진은 시적 탄력과 구성의 탄탄함 면에서, 최주연은 시적 포에지와 서정적 감성의 측면에서 그 가능성이 돋보인다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두 사람 간에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권수진의 시적 구상력, 시적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과 탄력에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최주연의 시적 포에지와 감수성, 언어 감각은 비록 당선자로 선정되지는 못했으나 당선자에 버금가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판단된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아깝게 탈락한 투고자는 좀 더 정진하여 차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장 : 정진규(시인, 현대시학 주간)
-심사위원 : 이숭원(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교수) 김춘식(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