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의 「팔월 즈음」감상 / 권혁웅
최영철의 「팔월 즈음」감상 / 권혁웅
팔월 즈음
최영철 (1956~ )
여자를 겁탈하려다 여의치 않아 우물에 집어던져버렸다고 했다 글쎄 그놈의 아이가 징징 울면서 우물 몇 바퀴를 돌더라고 했다 의자 하나를 들고 나와 우물 앞에 턱 갖다놓더라고 했다 말릴 겨를도 없이 엄마, 하고 외치며 엄마 품속으로 풍덩 뛰어들더라고 했다 눈 딱 감고 수류탄 한 발 까 넣었다고 했다
담담하게 점령군의 한때를 회고하는 백발의 일본 늙은이를 안주 삼아 나는 소주 한 병을 다 깠다 캄캄하고 아득한 소주병 속으로 제 몸에 불을 붙인 팔월이 투신하고 있다 자욱한 잿더미의 빈 소주병 들여다보며 나는 엄마, 하고 불러보았다 온몸에 불이 붙은 아이들이 엄마, 엄마 울먹이며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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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란 게 정말로 있구나. 제가 저지른 짓을 담담하게 회상하는 저 늙은이야말로 백발이 성성한 늙은 악이다. 하지만 이 시를 고른 것은 엄마를 찾는 저 아이의 간절함 때문이다. 아이는 “징징” 울다가 의자를 “턱” 갖다놓고는 “엄마” 부르며 우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인용부호 안에 든 말들이 전부 감탄사요, 의태어다. 엄마는 그렇게 간절하게, 즉각적으로, 온몸으로 찾아가야 할 존재다. 엄마, 엄마 울먹이며 세상을 떠도는 아이들 때문에 어버이는 있는 것이다. 내일은 어버이날, 붉은 카네이션이 무슨 수류탄 같다.
권혁웅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