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의 시적 표현 ― 정수경의 「최북」 / 이 찬
역사적 사실의 시적 표현 ― 정수경의 「최북」 / 이 찬
축시(丑時)의 먹물 속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훨훨 날으는 새 칠칠(七七)
붓을 입에 물고 날다가
툭, 떨어뜨린다 짖던 개가 받아 삼킨다
성벽 아래 잠든 그는
화선지 바깥이 안방인 것처럼
불기 없는 한데가 오히려 아랫목
동그랗게 몸을 말고
흰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다
한쪽 눈 찔러 거기에
태양을 심었다 빛이 뿌리 내리고
붓끝 따라 가지를 뻗어
산을 세우고 강을 만들고 구름을 띄워 새가 날고
새벽을 불러 안개 속에 길을 내면
한 세상이 저문다 한들
종이 한 장보다 무거우랴
술 한 병과 두부 한모에 그림을 바꾸던
그가 벽 없는 집으로 돌아간다, 훨훨
살을 에는 바람 붓끝에 묻혀
댓잎에 눈발 날린다 칼바람을 쏟아낸다
불을 삼킨 뜨거운 언어들이 먹물에 몸을 녹여
구만리 긴 하늘로 잠겨가는 새
훨훨 칠칠(七七)
훨훨 칠칠(七七)
검푸른 북명(北冥)의 바다
한 마리 곤(鯤)의 꿈이 얼음장 밑에 슬프다
― 정수경, 「최북 崔北」 전문
정수경 시인은 「최북 崔北」에서 상상의 인물이 아닌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 최북(崔北, 1712∼1786)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대단히 어렵고 또 위험한 작업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실존인물에 대해 문학적으로 접근한다든가 시적으로 표현할 경우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끊임없이 간섭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조정하고 유지하는가에 따라 시로서의 결과가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 경우 실존인물은 상상 속의 허구적인 인물이 되어버리고 또 그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것이 되면 시는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시의 형식을 빌려 기술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 혹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문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투명도는 높지만 화력이 약한 물과 불투명하지만 화력이 아주 강한 기름을 섞어서 새로운 인화물질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된다.
이제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시적 표현과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정수경 시인이 어떻게 그 둘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수경 시인은 시의 첫 번째 연에서 최북의 일생을 아주 간략하게 개괄한다. 최북은 붓 한 자루만 들고 살아가겠다며 자신의 호를 호생관(毫生館)으로 지었던 인물이며 어렸을 때에는 칠칠(七七)이로 불렸다. 최북 자신도 그의 이름인 북(北)을 파자(破字)로 만들어 곧잘 칠칠(七七)이라 불렀다. 바로 그와 같은 내용을 시인은 첫 번째 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연에서 중요한 것은 정수경 시인이 최북의 일생을 먹물 속 눈보라를 뚫고 붓 한 자루를 입에 물고 북으로 날아가는 새, 그리고 그 붓을 떨어뜨리고 개가 받아 삼킨다는 표현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수경 시인이 긴 산문적 기술(記述)을 요하는 한 인물의 일생을 시적 표현을 통해 지극히 짧고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또한 최북의 일생이 지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시로서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바로 그러한 것이 〈시가 역사보다 더 역사적일 수 있다〉는 말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시가 시적인 묘사와 표현을 통해 역사의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을 향해 곧장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개괄묘사는 시 전체에 대한 토대가 되며 뒤에 나올 모든 세부묘사와 표현의 출발점이 됨과 동시에 그것들의 핵이 된다. "성벽 아래 잠든 그는"으로 시작되는 두 번째 연은 그의 처량하고 외로운 신색을 나타내며, 또한 최북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경계'의 문제가 거론된다. 그는 화선지의 안과 밖에 대한 경계를 무시한 화가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림이 화선지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선지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벗어난 곳에까지 연장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러한 생각은 그 당시에는 당연히 궤변으로 들렸겠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동의를 표하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 의 이론도 실상 최북의 생각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데리다는 예술작품의 본질인 에르곤(ergon)과 그 주변에 있는 것들, 즉 파레르곤(parergon)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려던 사람이며 그의 이론은 최북이 주장한 〈그림 밖의 그림〉과도 논리적으로는 상당히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최북」의 세 번째 연을 시작하면서 시인은 "한쪽 눈 찔러 거기에 태양을 심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최북이 그에게 강압적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한 권세가의 강요에 저항하며 송곳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된 사실을 말해 준다. 애꾸가 된 최북의 초상화는 곧잘 자신의 손으로 귀를 자른 서양의 고흐에 비유되지만 그의 자해는 고흐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고흐의 자해는 다분히 정신병적인 행위에 가까운 것이었고, 최북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는 편집증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최북은 권력에 맞서 자신의 예술관을 고집하기 위한 자해였기에 근본적으로 고흐의 자해와는 다른 것이다.
시의 네 번째 연에서는 최북이 권세가의 요청을 거절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동전 한 닢을 받고도 그림을 팔았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그는 늘 가난한 화가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스스로 그 길을 택했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언제나 칠칠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시는 바로 그러한 최북의 삶과 그 삶 속에 들어있던 일화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시의 마지막 연에서 그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사실 최북의 최후는 그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운 겨울에 여러 날을 굶고 있다가 그림 한 점을 팔아 술을 마시고는 홑적삼을 입은 채 얼어죽었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작품을 통해 과거의 역사나 역사적인 인물을 그릴 때, 작가는 사실에 대한 투명한 재생과 불투명한 허구적 상상력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욱이 역사적 사실이 지니고 있는 진실의 무게를 문학작품이 온전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일종의 곡예가 된다. 그러한 곡예를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 결국 그 작가의 문학적 성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수경 시인은 역사적 사실 위에 자신의 언어를 덧씌우며 그 작업을 수행하며 시로 완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점이 역사적 인물을 소설로 쓰는 것보다 쉬운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설의 경우에는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며 그로 인해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이야기 사이의 갈등은 더욱 크고 깊어지게 된다. 또 그로 인해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진실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그러나 시인의 경우 역사적 사실의 시적 표현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러한 갈등의 골을 좀 더 적게 할 수 있다. 정수경 시인의 경우에도 그러한 점이 잘 활용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 문학작품이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룰 때 그것들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새로운 빛을 주고 흥미를 갖게 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 역사적 인물, 사건과 마주할 수 있게 해주며 그리하여 우리들 자신을 역사적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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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이 찬의 cy-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