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명시들

주막(酒幕)에서 (외1편)/김용호

솔 체 2019. 7. 2. 07:37

주막(酒幕)에서


김용호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수없는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친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눈오는 밤에

김용호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김용호(金容浩, 1912~1973).경남 마산 출생. 호는 학산(鶴山) 또는 야돈(野豚). 마산상고를 졸업했으며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 졸업.

1936년경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노자영이 주재한 <신인문학>에 시<첫여름 밤 귀를 기울이다>를 발표한데 이어,
<쓸쓸하던 그날>,민족의 비분을 읊은 장시 <낙동강>,단시<하루>등을 발표했고, 김대봉과 알게 되어 <맥>동인이 됨.
이때부터 적극적인 문학 활동을 하게 되었고, 박노춘의 소개로 첫시집 <향연>을 동경에서 발행.

광복 후에 발표한 제2시집<해마다 피는 꽃>에는 유학 시절의 민족의식을 느끼게 하는 시 <간다 거리에서>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어 <시문학 입문>, 서사시 <남해찬가>,<한국 애정명시선>을 간행했고,

1952년에는 시 <또 한 송이 모란> 등 50편을 수록한 제3시집 <푸른별>을 상재한 바 있음.
그는 시를 재치로 쓸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현실 인식이 남달리 강해 제 2시집에서 민족의 암담한 시절의 비분을 노래했는데 이 경향은 특히 장시<낙동강>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시집에 <향연>, <낙동강>(1943),<부동항>(1943),<해마다 피는 꽃>(1948),
<푸른별>(1952), 서사시집<남해찬가>,<날개>(1956)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