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명시들

아버지의 마음 (외2편)/김현승

솔 체 2019. 7. 6. 08:28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작가 소개
김현승(金顯承 1913-1975) 시인. 호는 남풍(南風)․다형(茶兄). 전남 광주(光州) 출생. 목사인 부친의 전근을 따라 평양(平壤)에 이주, 그 곳에서 숭실(崇實)중학과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교지에 투고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가 양주동(梁柱東)의 인정을 받아 <동아일보>에 발표(1934)됨으로써 시단에 데뷔하여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침”, “황혼”, “새벽 교실” 등을 계속 발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나타내어 주목을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가 8․15광복 후 1949년부터 다시 작품을 발표, “내일”, “동면(冬眠)” 등 지적이고 건강한 시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51년부터 조선대학 문리대 교수로 있으면서 박흡(朴洽)․장용건(張龍健) 등과 함께 <신문학(新文學)>(계간)을 6집까지 발행,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7년에 처녀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간행하고, 1963년에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1968년에 제3시집 <견고한 고독>, 1970년에 제4시집 <절대 고독>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자연의 예찬을 통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띠었으나, 8 ․15광복 후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세계를 보여 주었고, 말기에는 사랑과 고독 등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1973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74년 <김현승 시선집>을 출간했다. 저서로 <한국 현대시 해설>(1972), <세계문예사조사>(197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