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명시들

볼리비아의 기수(旗手) / 권일송

솔 체 2019. 8. 13. 11:45

볼리비아의 기수(旗手)
―도꾜 올림픽의 石川達三씨에게

권일송



당신의 국기는 <히노마루>였지만
당신의 마음은
뜨거운 인간(人間)의 내일을 보듬은 <코스모스>였다.

당신은, 石川達三―,
꽤는 이름 있는 <니홍>의 작가이지만
그 작가(作家)란 다름 아닌
핏줄 얽힌 따뜻한 공감(共感)으로써
어려운 산과 바다를 넘고 헤쳐
인간끼리의 신뢰(信賴)와 합의(合意)의
더운 손 닿을 때까지,
마음으로 울고
손으로 저항(抵抗)해 가며
결코 우리와 멀리 질시(嫉視)해 가며
존재(存在)할 수 없는 이름이었음을
이제사 깨닫는 나는,

당신이 일본 사람임을
슬퍼해서가 아닌,
나대로의 크나큰 충격적(衝擊的)인
바위와 철망(鐵網) 앞에 서서 있기 때문이다.

<도꾜>의 가을 하늘
1964년 10월 10일
눈부시게 채색(彩色)의 사막(沙漠) 같은
그 편편(翩翩)한 깃발들의 열병식(閱兵式)이
청(靑), 홍(紅), 백(白), 황(黃)……,
제마다의 겨레와 그 꿈을 걸어
<힘>과 <기(技)>의 제전(祭典)에 참여(參與)했던 날

구름같이 피어 솟는 <메인 스타디움>,
94개국의 6천여 젊음,
서로 애써 땀 흘린 돈과 사랑을 지고
소소(蕭蕭)히 밀려드는
오직 한 줄기 강물의 범람(氾濫)이었을 때

그 속에서 당신은,
친구 石川達三씨―
단 한 사람,
참으로 빛나는 우울(憂鬱)과 고독(孤獨)을
울고 있었던 것을,

일본 사람,
지금도 우리의 귀에 눈에
비만(肥滿)한 적의(敵意)로써 남아 흐르지만

당신에게만은
그렇게 허술히 느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못난 군벌(軍閥)의 후예(後裔) 같은
생각이 안 나는 것은,

증오(憎惡) 대신의 사랑이란 것,
소외(疎外) 대신의 믿음이란 것,
진정으로
우리들의 친구와 이웃이란
식량(食糧)과 비료(肥料)만을 실어다 주는
먼 나라의 사람과 그 악수(握手)뿐이라는
기왕(旣往)의 허망한 생각들이
지금 당신의 그 따순 인간(人間)을 통해
해빙(解氷)이듯 스러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와 축포(祝砲)가 하늘을 덮고
늙은 천황(天皇)의 목소리는
상기 <능력>의 일본을 어설프게 상징(象徵)했지만,
이 훤소(喧騷)―,
이 작렬(炸裂)―,
이 흥분(興奮)―,
그 속에서 당신만은
세계(世界)는 아직도 <하나>가 아니란 것을,
날아가는 비둘기의 선회(旋回) 속에서도
한 줄기 전쟁(戰爭)의 예감(豫感)을 발견하고
<평화>와 <하나>의 이름 밑에서
그 얼마나 실속 없이 들떠 있는
사람들 사이,
당신은 놓쳐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비극(悲劇)과 진실(眞實)을
가혹하게 의식했던 것

당신의 눈에
그 날,
<남베트남>은 와 있어도
<북베트남>은 보이질 않고
대만(臺灣)의 깃발은 나부껴도
또 하나의 중국(中國)은 소리 없이 잠잠하고
<시리아>도 없고
<남아공화국>도 없이
<동서 독일>은 한 깃발 아래
줄지어 그 날을 웃고 섰어도
<북한>은 등 돌리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가 잘못 되어 있는가,
무엇이 잘못 되어 있는가,
당신은
서늘한 <니홍>의 작가
石川達三씨―,

그뿐 아니다.
수풀 같은 행진(行進) 속에
단 한 사람
<볼리비아>의 선수(選手)가
가난한 제 나라 국기(國旗)를 붇안으며
걸어들어 왔을 때,
그의 좁은 어깨 위에
조국(祖國)과 깃발이 홀로 빛날 때,

그 뒤로 이어
<알제리아>도 <가나>도,
<모나코>와 <카메룬>도,
<리비아>, <니젤>―,
그리고 <리베리아>도
―, 단 한 사람뿐,
그의 좁은 어깨 위에
조국(祖國)과 깃발이 홀로 빛날 때,

―, 당신은 그때,
인간(人間)과 그 인간(人間)이 만들어 모여 사는
나라와 세계(世界)가 무엇이며
그것들을 다 털어도 메꾸어지지 않을
깊은 고독(孤獨)이란 것을,
7만 5천 개의 가슴을 한데 묶어도
채워지지 않을 그 거대하고
장엄한 고독(孤獨)을 위해…,
당신은 조용히 울고 있었다.

어느 날
아주 먼 날,
나는 당신을 만났을 때 이야기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생각들이 우연히도
뜨겁고 하나였을 때,
그때 이미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고
기어코 우리는 인간(人間)의 노래를 부르고
비로소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볼리비아>, 그 서러우나 늠름한 하나의
깃발처럼,
우리의 시(詩)와 세계(世界)가 빛나고
속으로 뜨겁게 맺어질 날을 위하여
언제까지나 이 명암(明暗)의 10월을
기억(記憶)하며 살자고 石川達三씨.




<주> 1964년 10월 11일(일요일)의 <朝日新聞> 제2부 제1면의 石川達三씨의 「개회식에서」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