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명시들

천파만파 / 김광협

솔 체 2019. 12. 29. 14:50

천파만파

김광협



남정네들이 낫을 간다.
낫이 무디어졌다고 슥삭슥삭
낫의 날을 세운다.
보리 한 단을 베어 넘기기 위해서
숫돌의 몇분지몇푼을 축낸다.
뻐꾸기 소리와 꿩꿩 장 서방 소리가 와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 소리가 와서 먹는다.
파도가 넘실넘실 넘실거린다.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가 일어난다.
보리밭에 파도는 천파만파(千波萬波)로 들락퀸다.
에익 파도를 넘자. 넘어서 가자.
남정네 한평생 까짓. 파도쯤이야.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허리춤에 차고
이 세상 더러운 세상 까짓
낫 한 자루. 그것이라도 휘두르며 넘어서 가자.



*들락퀸다 : [제주방언] '날뛴다'의 뜻보다 더 강한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