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명시들

내 이렇게 살다가 / 신중신

솔 체 2020. 4. 29. 00:03

내 이렇게 살다가

신중신




내 이렇게 살다가
한여름밤을 뜨겁게 사랑으로 가득 채우다
모두들 돌아간 그 길목으로 돌아설 땐
그냥 무심코 피어날까
저 노을은 그래도 무심코 피어날까

그러면 내 사랑은
무게도 형체도 없는 한 점 빛깔로나 남아서
어느 언덕바지에
풀잎을 살리는 연초록이라도 되는가

밤새워
바늘구멍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던
우리 엄마는
죽어서 바늘구멍만한 자리라도 차지할까

가을은
졸음이 육신 속을 스며들 듯
나를, 시들은 잔디 사이
고요한 모랫길로 끄을고 가는데
끄을려 가는 발자국에 진탕물이라도 고여
내가 지나간 표지라도 되었으면...

꽃은 시들어
우리의 기억을 살리는 다리가 되나
땅 속에 사무쳐드는
한 가닥 향기로나 남아 있나

살아서 이 세상을 가득 채우던 모든 것이 되어
죽어서 모두들 돌아간 그 길목으로 돌아서면
가을밤 하늘에
예사로 하나 둘 별이 돋을까
무심코 별은 빛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