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의 환상, 어떻게 볼 것인가
강 정 구
1. 두 가지의 오해들
최근 들어 우리 문학계에는 환상적인 요소를 주요 방법으로 활용하는 시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런 시를 쓰는 자들이 어떤 주의나 주장을 내세우거나 모임을 만든 바 없는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의 관심은 자못 뜨겁다. 그런데 일부 평론가들은 편협한 시각에 치우쳐서 환상적인 시 경향을 논의하고 있는 듯하다. 평론가라면 새로운 시 경향에 대해서 의미 있는 문제제기와 엄밀한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러한 작업이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모색과 노력에 대해서 너무 큰 비평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사실 문학은 그 자체가 환상이다. 그것은 현실에 없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환상이다. 또한 독자가 이야기의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감상의 과정 역시 환상이다. 그렇지만 요즘 논쟁이 한창인 환상 개념은 토도로프(T. Todorov)가 그의 『환상문학서설』에서 주장한 것에 근거를 두는 듯싶다. 그에 따르면 환상이란 “자연의 법칙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분명 초자연적 양상을 가진 사건에 직면해서 체험하는 망설임”으로 규정된다. 이런 규정에 따르면 최근 들어 여러 문예잡지에 발표된 황병승, 권혁웅, 조영석, 김이듬, 이민하의 시편들은 현실 속에 비현실적인 소재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환상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문학이 환상문학에 속하느냐 여부는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지만, 문제는 이러한 문학 속의 환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최근의 문학계에서는 우려할만한 두 가지의 논의를 내놓고 있다. 하나는 황병승의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에 해설을 쓴 이장욱 시인의 논의이다. 이장욱 시인은 황병승이 보여주는 여러 실험적인 시도들에 대해서 “혼종성만이, 이곳의 원리이다”라는 긍정적인 입장을 개진한다. 그의 시집이 우리 사회에서 형성된 여러 중심 이데올로기들을 주변들과 뒤섞어놓는다는 점을 강조한 해석이다. 여기까지는 이장욱 시인의 생각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그가 “시코쿠 맵의 이 어지러운 언어들은 법과 도덕과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 바깥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불가피한 감각이다. 이것은‘언더그라운드’의 시편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주변의 또 다른 중심화 논리로 오해될 여지가 너무도 크다. 황병승이 그의 시집에서 보여주는 性的인 혼종성만 예로 든다고 쳐도, 그것은 주변(‘이반’)으로 중심(‘일반’)을 대체하거나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도 주변이 이미 뒤섞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계간 〈시작〉 2006년 봄호에 게재된 평론 「환상적 실험시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서 보여준 엄경희 교수의 논의이다. 엄경희 교수가 명명한 ‘환상적 실험시’가 과연 타당한 용어인가라는 질문은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해석이 새로운 시 경향의 가치와 의미를 너무 경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특히 그는 “새로운 방법의 추구가 개인의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연관되지 않을 때 그것은 유희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실험에 대한 자의식이 결핍된 시란 언어도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세계관이 주동하는 절박성이 전제되지 않은 새로움의 추구란 위태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환상적인 시 경향은 그의 주장대로 실험에 대한 자의식이 결핍된 시일까? 文이 자기 몸의 상형문자란 점에서 글쓰기(시쓰기)란 자기에 대한 의식, 즉 자의식과의 대면이라는 일반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의 시편들에는 시인의 자의식과 현실인식이 그렇게 함량 미달되는 것일까? 새로운 시 경향에서 시인의 자의식과 현실인식을 찾아보는 일은, 단순히 옹호하는 차원이 아니라 좀 더 잘 읽고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다.
2. “우리들이 찾는 것은……”
새로운 시 경향에 대한 자의식을 논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황병승의 시부터 살펴봐야 할 듯싶다. 황병승은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시집과 그 이후의 시편들에서 일관되게 환상적인 요소를 시의 방법론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런 방법론이 비판적인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황병승에 대한 비판 중의 하나는 그의 시가 과연 시적인 것인가라는 다소 원론적이고 원색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 속에는 시라는 장르가 지닌 존재 탐구의 기능을 과연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서 이러한 질문은 좀 조심스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질문이 너무 거칠기 때문에 쉽게 반대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황병승의 시 「눈보라(snowstorm) 속을 날아서(하)」는 가장 황병승다운 시이지만 이런 비판들을 쉽게 피해간다. 그의 시는 비유와 상징이 시의 중심원리가 된 서술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존재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다음은 마약을 한 ‘나오코’의 말인데 그것은 환각의 순간에 튀어나온 醉言으로, 그 취언의 내용은 상당히 몽환적이다.
“이봐, 부기주니어…… 미안하지만, 나는 불러본 적이 없어, 한 번도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찾아본 적이 없다. 널 어떻게 부르지, 너라는 마음을, 지난 밤엔 냐라키 언니가 떠났어. 너도 알지, 매일매일 누군가는 떠나, 냐라키, 이제 언니를 어떻게 부를까, 너를 어떻게 부르지, 나는 누구도 부르고 싶지 않아, 냐라키라는 마음을, 그리고 너라는 마음을, 또는 그 전체를…… 그리고 동시에…… 또 가운데……”
(……)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아 헤매는 것은
아름다운 센텐스
─「눈보라(snowstorm) 속을 날아서(하)」, 〈문학동네〉, 2006년 봄.
위의 시에서 “널 어떻게 부르지”라는 ‘나오코’의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타자에 대한 호명행위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그녀의 말은, 현실과 불화하는 존재의 고통과 갈등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너’라는 대명사는 현실 속의 ‘부기주니어’를 지시하면서도 그 ‘부기주니어’의 ‘마음’과 ‘전체’로 표현되는 어떤 진실을 상징한다. 이때 ‘나오코’는 “한 번도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찾아본 적이 없다”와 “나는 누구도 부르고 싶지 않아”라는 말에서 보듯이, 호명되지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외면 혹은 거부한다. 그녀는 타자와의 합일을 꿈꾸지만 그것이 좌절되는 현실에서 거부와 소망을 인접시키는 역설의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타자와의 합일은 현실에서 언제나 거부당한다. 그 때문에 “한 번도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찾아본 적이 없다”며 타자를 호명하는 행위를 포기 또는 외면한다. 그러나 여전히 타자와의 합일을 꿈꾸기 때문에 “널 어떻게 부르지”라고 소망한다.
이 심리과정에서 정작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나오코’의 존재성에 대한 시인의 심도 있는 해석이다. ‘나오코’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진실을 담은 것으로 가정되는 “아름다운 센텐스”를 찾는‘우리들’이란 누구인가. 라깡(J. Lacan)의 사유를 빌려보면,‘우리들’이 찾는 “아름다운 센텐스”란 여러 등장인물들이 욕망하는 어떤 대상이지만 손에 쥐면 다시 다른 대상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 무엇이 아닐까. 이 점에서 ‘나오코’는 바로 결핍으로 존재하는 욕망의 주체인 인간 존재의 한 표상이다. 이러한 인간 존재 탐구의 시를 굳이 시적인 것이 함량 미달된다고 논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구멍’의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권혁웅의 시 「상상동물 이야기15─관흉국인(貫胸國人)」은 이러한 예가 된다. 그는 상상동물을 현실 속으로 호명함으로써 환상적인 요소를 시에 도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 존재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인다.
해외(海外)의 동남쪽에 관흉국이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귀한 사람을 모셔갈 때, 앞뒤에 선 사람들이 긴 장대를 가슴에 꽂고 그걸로 귀인을 꿰어 간다
상처 받은 사람을 곧장 떠올린다면
당신도 한때는 관흉국에 살았다
그 사람이 오래된 타일처럼 떨어져나갔다
대신에 그곳을 바람이 들고난다
─「상상동물 이야기15─관흉국인(貫胸國人)」 전문, 〈시와반시〉, 2006년 봄.
“긴 장대를 가슴에 꽂고 그걸로 귀인을 꿰어” 가는 관흉국인의 이야기를 “상처 받은 사람”의 알레고리로 읽는다면, 관흉국은 하나의 우화시가 될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당신도 한때는 관흉국에 살았다”라는 진술을 통해서 관흉국의 세계를 현실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때 독자는 관흉국에 ‘살았’던 듯한 환상에 빠지게 된다. 상처받은 자의 마음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관흉국인의 이미지를 통해서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나아가서 관흉국인이 된 듯한 이 환상은 인간의 내면(‘가슴’)에 난 존재론적인 구멍을 살피는 계기가 된다. 그 구멍은 상처받으면 생기고 치유되면 아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환상의 구멍이 있으며, 그 구멍은 인간의 존재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오래된 타일처럼 떨어져나”간 “그 사람”이라는 구멍의 이미지는, 누가 채워주거나 메울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에서 근원적인 결핍을 지닌 인간의 존재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3. 삶의 현실을 좀 더 잘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
새로운 시 경향을 시적인 범주에서 몰아내려는 시도와 함께 우려되는 것은 삶의 현실과 무관하다는 논의이다. 이 논의는 새로운 시 경향이 삶의 현실에서 절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채 상투적이고 자극적인 잔혹성에 기대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문학이 삶의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반영한다는 문학원론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환상의 動因이 삶의 현실에서 결핍된 욕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환상이야말로 우리 삶의 현실을 좀 더 잘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필자의 이러한 생각을 밑받침해주는 시로 조영석의 「새로운 군주(君主)」를 들 수 있다. 이 시에서는 우리 삶의 현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獨我論的인 태도를 소재로 삼고 있다. 이때 환상의 요소가 가미된 “거대한 입”의 이미지는 상호소통을 거부하는 독아론적인 존재들의 현실을 좀 더 잘 표상하는 상징이고, 그 이미지의 잔혹성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척하며
오직 혼자로만 존재한다.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출생 전부터 신성한 조약을 맺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그들은
보다 완벽한 몸체를 갖기 위해
유일한 약점인 두 귀를 뜯어먹는다.
이빨과 입술만 거대해지고
점점 빛을 두려워하며
좀처럼 사물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두 눈이 멀어버린 거대한 입이 되어
지팡이도 없이 어디든 돌아다닌다.
앉을 곳을 찾으면 그 입은 서서히 열린다.
한 번 열었다 하면 수억 톤의 말을 방류한다.
(……)
거리의 의자에도 사무실에도 버스에도 지하철에도
산 속에도 바다 위에도
지구 밖 어딘가에도 그는 있다.
시뻘겋게 살이 오른 입으로만 걸어다니는
사람의 실로는 절대로 꿰맬 수 없는
─「새로운 군주(君主)」 부분, 〈시작〉, 2006년 봄.
위의 시가 주목되는 이유는 근대적인 주체 혹은 독아론적인 존재를 화두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주체는 생각하는 존재이되 자기 사유의 틀 속에서만 생각하는 존재이다. 근대적인 주체는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타자를 주변으로 배제시켜버려서 주객 사이의 상호소통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는 말을 하되 자기 코드의 규칙만을 가지고서 말하는 독아론적인 존재이다. 이 시는 바로 근대가 만들어놓은 주체를 묘사한다. 그는 “오직 혼자로만 존재”한다. “보다 완벽한” 주체이기 위해서 세계 속의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두 귀를 뜯어 먹”고 세계의 “사물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거대한 입”이라는 환상적인 이미지는, 우리 삶의 현실을 좀 더 잘 이해시켜주는 한 방법이 된다. “거대한 입”인 “새로운 군주”는 “거리의 의자에도 사무실에도 버스에도 지하철에도” 있는 우리 자신의 극단적인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거대한 입”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잔혹성 또는 괴기성 역시 단순히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것일 수는 없다. “잔혹극에서 살인적이며 피비린내 나는 모든 형상은 문명이라는 껍질에 싸여 현대인들이 상실한 열정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라는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의 말을 상기해보면, “거대한 입”의 잔혹성 속에는 삶의 현실을 비판하되 그 현실에 매몰되어 되살아나지 않는 “상실한 열정을 일깨”워 새로운 삶의 현실을 모색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삶의 현실과 관련하여서 새로운 시 경향에 대한 비판 중의 하나는 섹슈얼리티를 너무 남발하거나 강조한다는 것이다. 물론 삶과 섹슈얼리티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삶의 전부가 섹슈얼리티가 아닌 이상에 지나친 강조는 오히려 삶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은 일견 타당한 듯도 하지만 섹슈얼리티가 그 이상의 무엇을 암시하면서 오히려 삶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좀 인색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스키강습과정을 섹스행위와 병치시켜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시킨 김이듬의 시 한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머리가 텅 비는 스릴의 한복판에서 이러면 어째요, 선생님 아니 너, 스키까지 내동댕이치고, 눈 속에 파묻혀 왜 있니? 약간의 부상은 참아봐라, 더 박동치고 흥분되지 않니? 부츠를 벗을 거니? 저기 우리가 출발했던 산의 절개지에서…… 사람들이 쏟아지는 걸 봐봐, 몽환적이지 않니? 안 되겠어요? 에잇, 패트롤카 오잖아
안 녕
새카만 하늘과 뽀얀 눈이 뒤섞인 저 산 꼭대기, 눈 위에 남은 새빨간 솜사탕, 대비색이 이렇게 조화가 잘 되었었나, 난 추워지면 발동하고 더 높이서 추락하는, 재미를 봐서 아무리 타일러도 세상없는 스키어, 롱 키스는 기본이고 굿 나잇도 깔끔하지, 저기 위쪽 자국 없는 눈 위로, 신중한 당신의 손을 이끌고 갈게, 책임지고 밀어줄게, 준비됐어요?
─「동승자 3 ─너의 심야스키 강사」 부분, 〈시작〉, 2006년 봄.
위의 시가 스키강습과 섹스행위를 오버랩시키는 것이라고 해도 단순히 선정적이거나 도색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더 박동치고 흥분되지 않니?”나 “롱 키스는 기본이고 굿 나잇도 깔끔하지”라는 선정적인 서술을 전략으로 택하고 있으나, 위의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적인 욕망을 발설하되 너무나도 지나치게 발설함을 통해서 삶의 욕망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난 추워지면 발동하고 더 높이서 추락하는, 재미를 봐서 아무리 타일러도 세상없는 스키어”라는 구절에 오면, 성적인 욕망은 단순히 성적인 만족에 도달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김이듬의 시집 『별 모양의 얼룩』 해설에서 “억제된 욕망을 뚫고 욕망하려는 허기, 욕망에 대한 허기”라고 말한 황현산 교수의 주장대로 오직 욕망만이 남은 존재, 그 존재의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결핍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환상적인 요소는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현실의 단면을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한 방법이 된다.
4. 환상의 힘
무엇보다도 환상적인 시 경향을 오해하는 해석들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시정신의 부재를 탓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법들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그것은 나름대로 문제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기모순을 심각하게 내포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새로움이란 늘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고, 또 그 노력이 만만치 않은 것이라면 분명히 어떤 정신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는 환상적인 시 경향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새로운 경향에는 환상의 힘을 찾으려는 시정신이 있다. 이 시정신은 환상이라는 시적 실험을 통해서 인간 존재와 현실의 관계를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이민하의 시 한 편을 보자.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가 엄마를 등 돌리고 누워 있네
잔뜩 뿔이 난 아이에게 얘야 자장가를 불러줄게
엄마는 다가가 어루만진다.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아이의 뿔을 갉으며 뽑으며
피부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으며
(……)
보이는 것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살아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체리냄새 들킬라
피가 달콤한 유령이 되어
뿔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뿔뿔이 헤매면서 사람들은 뿔을 접었다 폈다
뿔뿔이의 놀이
뿔뿔이의 힘
─「뿔뿔이」 부분, 〈시와시학〉, 2006년 봄.
“잔뜩 뿔이 난 아이”의 '뿔'은 화를 의미하지만 그 화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위 시의 화자에 따르면 그것은‘엄마'가 위로하면 사라지는 것이지만 단순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의 무의식 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면서 ‘아이’의 정체성과 존재성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적 화자는 자기다운 어떤 것(‘뿔’)을 만들어가는 삶의 과정을, ‘뿔’이라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드러냄과 숨김이 곧 “뿔뿔이의 놀이”이고, 그것이 ‘뿔’을 가진 인간 존재의 모습인 것이다.
환상을 시적인 방법으로 활용하는 위의 시는 시인의 시정신을 잘 느끼게 한다. 시인이 보여주는 환상은 유희 그 자체의 향유가 아니다. 그 환상은 인간 존재란 무엇이고, 존재들의 관계란 왜 만들어지는가, 존재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현실과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이민하는 이러한 질문을 ‘뿔’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환상을 활용한 시적 실험은 현실에 대한 풀리지 않은 의문을 탐색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정신의 소산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환상을 새로운 시적 방법으로 활용하는 시에는 현실과 존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애쓰는 시정신이 들어 있으며, 이때의 시정신은 주목할만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새로운 시 경향에 대해서 좀 더 너그럽고 포용적인 시선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새로움은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에 따라서 그 가치와 의미가 확장되고 심화되기 때문이다.
― 《문학수첩》200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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