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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시의 초심 닦기 (6) / 위선환

by 솔 체 2014. 10. 12.

이상하게 우리나라 비평계에서는 비평가가 육십이 될 때까지 계속 비평을 하는 경우가 없어요. 대개가 삼십대에 등단을 해서 사십대 초반이 되면 절필을 해요. 이들 비평가들의 감성이라는 게 그들 또래의 감성에 호감을 갖게 되니까 자연히 또 비평의 방향이 그렇게 되고, 또 그 내부에서 인간적인 인맥이 형성되고..., 결국 시야가 아주 좁은 것 같아요. 이건 우리가 반성하고 고쳐야 할 일인데, 외국처럼 백발이 성성한 사람도 비평을 할 수 있는 그런 풍토가 되면 우리나라처럼 비평이 유행처럼 끝나고, 자기 세대와 함께 죽어버리고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두 번째 이야기 하고 싶은 건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거예요. 한국이 젊은 시인들은 몇몇의 모델이 있고 그것을 부추기는 평론가들이 있어요. 그리고 집단화 되어서 몰려다니고 그러는데, 집단화, 획일화라고 하는 것 뒤에는 문학권력이 있어요. 문학권력이 추켜세우는 시인들을 좋다고 뒷북치고는, 정작 뭐가 좋은지도 모르는 거예요. 문학사에 몇 명이나 남겠어요? 만 명 가운데 이삼십 명 남을까? 나머지는 다 엑스트라지. 엑스트라로 산다는 건 참 억울한 일이에요. 자기의 시세계를 가지고 자기의 시를 쓰고 뭔가 남과 다른 자기가 있어야 해요.

- 오세영 / [현대시학] 2006년 4월호/ 대담



속도의 시대에 돌입하면서 사색의 시는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화려한 수사나 말놀이, 현란한 시들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시로 각광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발 빠른 감각의 지상주의 시대를 향해 치달려 가고 있는 것 같다
시가 엄숙주의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속도의 시대에도 시의 정통성이나 시의 위의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시단의 일각에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경쾌한 속도감이 때로는 경박한 소모적인 시를 양산하는 빌미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것은 그간의 문학사에서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 최동호 / [현대시학] 2006년 4월호



김백겸 : 시가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다루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은, 결과적으로 현재의 한국 시단의 과도한 레토릭적인 경향에 대한 비판, 즉 수사에 치우치는 추세에 대한 비판으로도 들리는데요.

문정희 : 한국어로 한국인의 삶과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한국시라 한다면, 요즘 한국시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래요. 편한 것, 전통적인 것에 대한 안주를 두둔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고요, 새로운 것이 예술의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새로운 것이 반드시 언어의 과장이나 뒤틀린 엽기적 상상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감동의 창출이 중요하니까요.

양애경 : 저도 늘 그런 생각을 해요.
김백겸 : 새로움을 찾고자 하는 노력인데, 수사의 새로움을 찾다 보니까 극단적인 난해성을 수반하게 되곤 하지요.
양애경 : 그런 경향의 문제라기보다는 기교적인 것만을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시를 무시하는 문단 분위기가 문제 아닐까요.

문정희 : 문단이 너무 비대해지다 보니까 정치적이 되어버린 부분이 있습니다. 힘을 가진 일부 평자들이 선택한 텍스트가 패해를 낳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더 큰 문제는 아마추어의 범람이에요. 수사가 세련되면 소통은 되겠지만, 소통 자체도 차단되고 있거든요. 그 이유는 개인성에 매몰되어 있고 완숙이 안 된 작품이 조급하게 발표되고, 또 평자나 독자들은 내용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알아듣는 척하고 있거든요. 참 한심함 풍경이지요.

김백겸 : 개인의 내면을 외부대상에 의탁하지 않고 내면 무의식을 직접 기술하다 보니까 생경하고 과도하다는 인상이 있는데, 결국 개인상징을 즐긴다는 거겠죠.

문정희 : 그렇게 하려면 무당이나 예언자가 밀실에 앉아 자신을 표현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혼자 그러면 모를까 개인적 암호같은 걸 문예지에 발표하면서 독자를 기만하려 해선 안되겠죠.

양애경 : 주제가 난해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닐 거예요. 기본이 탄탄한 시인이라면 어떤 난해한 주제를 다루어도 독자에게 읽힐 수는 있을 것 같거든요. 독자의 소외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소수의 귀족적인 문인들끼리만 읽고 쓰고, 또 자기들끼리 칭찬하면서 다른 작품들은 안 읽어주는 태도지요. 이런 풍조는 아무리 좋은 작품을 써도 제대로 읽어줄 사람이 없다는 좌절감을 줍니다.

- [문학마당] 2006년 봄호/ 좌담



- "봄이 되어 / 새싹이 / 흙을 깨고 나온다" 라는 시가, 뭐 환경과 생명사상을 최대한으로 형상화한 기막힌 작품이라고?
불성실한 뿐만 아니라 학생의 습작보다도 못한 아무개 시인의 작품에 대하여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아부비평을 한 것을 내가 알게 된 것이었다. 학교에서 아무리 똑바로 가르쳐서 졸업을 시켜도 문단에 나가면 곧바로 배타적 패거리에 휩쓸려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商術과 藝術의 근본을 모르고 명상이나 고독의 곁에도 가지 않은 채, 오래 된 수도꼭지에 녹이 끼듯, 이른바 문단의 역학구조에 의하여 한 겹 두 겹 두꺼워진 관습을 무슨 청동갑옷인 줄 아는 자들이, 상술과 예술을 如反掌으로 변환시키는 패거리들이 옹호하는 시인의 작품이므로, 무조건 쌍수를 들어 호평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의 시단의 사정은 玉石이 구분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玉과 石이라는 개념 자체가 궤멸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시는 정말 좋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는 그동안의 나의 태도가 스스로 무력하게 생각되었다.

- 오탁번 / [시선] 2006년 봄호



요즘의 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시단과 시비평은 그러한 어려움을 너무나 유연하게 해결하고 있다.
내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시의 문법이 어려워지고 고급화되어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인 사고에 매몰되어 시의 기본적인 합의를 어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시에서의 말(언어)의 사용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시비평은 이러한 개인화와 암호화를 함부로 옹호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문제는, 허술한 시집을 함부로 칭찬하는 것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뛰어나고 정교한 시집들을 어렵다는 이유로, 손쉽게 해석하고 함부로 의미 부여하는 것에 있다. 함부로 의미 부여된 시집들이 세상에 널렸기 때문에, 진질로 의미 부여될 시집들은 사장될 지경이다. 또 그러한 해석이 판치면서 남이 알아듣지 않도록 시를 쓰기만 하면 좋은 시가 된다, 는 좋지 않은 속설도 유행하는 것 같다.

과거 우리 시의 요체는 비유였다. 일상어를 비틀어 시어를 만드는 능력은 비유의 생산능력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중시한 것은, 세상의 많은 물상들을 시를 통해 축약하는 과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나'와 '나의 주변'에 널려 있는 물리적. 심리적 정황들을 언어를 통해 정리하고 응축하는 작업이 '시'였다.
하지만 요즘의 시들은 그러한 작업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요즘 시들은 세상의 복잡함을 설명하려고 하고, 긴 문장과 장황한 묘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는 길어지고, 시는 한층 복잡한 정보들로 가득 차게 된다. 비유를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과거 우리가 배웠던 비유들은 '은유'나 '직유'를 골자로 하였다. 문장의 표현만 보아도, 이것이 은유이고, 저것이 직유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은유 같지 않은 은유, 직유 같지 않은 직유, 아니, 비유 같지 않은 비유, 수사 없는 시를 사용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그 결과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이중적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비유 자체의 원상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작업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시인들은 이해받지 못하는 시를 쓴다는 것에 필요 이상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 김남석 / [애지]2006년 봄호



...90년대 우리시에 나타난, 그리고 진행중인, 비극의 참상을,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몇 가지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째, 거대담론이 해체되면서 시에서도 일상의 사소함에 매달리는 경향이 짙어졌다. 둘째, 세기말적 징후들을 묵시록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려는 염려들이 많이 나타났다. 셋째, 지난 19세기말에 보였던 아방가르드적인 요소가 다시 등장하였다. 넷째, 후기산업사회의 병폐로 지적되는 사회현상들, 예를 들어 환경문제, 여성문제, 도시화문제 등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다섯째, 문학의 분화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즉 인식론적.방법론적 분화는 물론이거니와,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분화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앞의 다섯가지가 시 작품 내부의 문제라면, 다음의 네 가지 문학 외적인 환경의 변화도 시의 앞날을 위하여 호의적이지 않다. 계속 짚어보면 여섯째, 시인의 무더기 양산과 창작매체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독자 수용층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일곱째, 문학의 사회적 공헌/역할 공간이 대폭 축소되고 있다. 여덟째, 시의 창작주체인 시인들 자신이 사회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만큼 우리 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아홉째, 앞날의 중요한 정보 전달 매체로 사용될 멀티미디어의 일방통행적 공격성과 시의 느릿느릿한 상호 텍스트성 사이에는 도저히 접근하지 어려운 벽이 가로놓여 있다.

- 정한용/ 평론집 '울림과 들림' 중에서



소설가 박상륭이 '??'이란 말을 만들어 낸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 1음절의 말은 '몸'과 '맘'과 '말' 이 동시적으로 하나가 된 탁월한 조어입니다. 그런 총체성의 세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 산문 형태의 시는 바로 이에 걸맞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체성이 탄생시킨 바로 그 '??'의 형식이지요.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가 함께 하고 있는 이 형식이라야만 나는 자유롭습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요즈음 대부분의 시들이 특시 젊은이들의 시가 산문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폐쇄적 혼미로 얽힌 우회와 굴절의 이상한 문체로 된 산문을 시로 읽을 수는 없지요. 운문일 수 있는 산문이어야 합니다. 산문시는 그런 生體 리듬의 것입니다. 크게 말하자면 宇宙律의 것입니다. 놀랐습니다. 요즈음의 시들을 읽다 보면 행갈이, 연갈이가 된 시들이 산문체의 제 시보다 더 산문이 되고 있습니다. 그 자체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산문화는 시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순수 한글로만 시를 쓰려다 보면 시의 함량이 감량 축소될 뿐 아니라 의미나 이미지의 적시가 어려울 때가 많음을 저는 직면해 오고 있습니다. 음성 언어인 우리 언어는 이를테면 永郞의 시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유연한 음악성과 그 음성 상징은 탁월한 유퍼니 현상을 나타낼 수 있으나 추상적인 내면성, 그 사유의 존재성을 표출하는 데는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거기에 이미 한자어는 오랜 우리 역사적 삶 속에서 생활화된 문화의 정신이요 육신이라고 볼 때, 이를 억지로 배제하다 보면 넓게는 문화적 공동현상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시를 쓰다보면 한자어의 외형적 형태가 시의 강골성과 유연성을 조절하는 하나의 훌륭한 미학으로 그 평균율의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제발 한자어는 한자어 그대로 놓아두기를 바랍니다. 거기다 한글로 또 음을 달다 보면 집중감은 물론 그 의미, 이미지, 음률이 와해되고야 맙니다.

- 정진규 / <푸른 시> 제7호 대담에서



작품론 딸린 작품은 평론 쓰기 싫어한다. 이미 전문적인 평론이 하나 붙은 시를 굳이 다시 말하기 싫어서이다. 거대 출판사의 지나치게 권력화된 잡지에 실린 좋은 시도, 잡지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제외한다. 자체적으로 가동되는 평론가들이 많이 있으니 굳이 나까지 거둘 필요가 있을까 해서 이다. 어느 시인의 시는 시인에 대한 나쁜 소문 때문에 뺀다. 단순한 오해일 수도 있지만 다른 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분명 좋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래 전에 높은 평가를 받아 문명을 획득한 중진 시인의 작품은 언급하기 불편하다. 평론에 자주 언급되는 시인도 뒷북치기 싫어서 빼고, 시는 좋은데 시인이 너무 대중적이라 빼기도 한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거론하기 거북해서 빼고, 참 곤란한 일이지만, 시는 너무 좋은데 월평 쓸 말이 없어서 뺀다.
평론은 생리상 말할 거리가 있는 시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기준은 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자의 개인적 관심사에 있다. 그러니 언급되지 않는다고 서운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래서 김수영 풍으로 말할 수 있다. 월평이 위대한 것이라 한 사람들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월평 해본 사람은 알지, 언급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월평이 왜 작위적인가를, 월평은 왜 작위적이어야 하는 것인가를.

- 박현수 / [현대시학] 2005년 12월호



요즘 새로운 세대의 시를 읽다보면 분망한 상상력과 역동적인 언어에 놀랄 때가 많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으로 과연 깊이 있는 천착이라는게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예술가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세계를 평생토록 파고드는 끈기와 열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깊고 넓은 물에 큰 고기가 살 텐데, 큰 사상이 없이 뚜렷한 지향점이 없는 요즘, 젊은 세대는 감각이 너무 성한 듯하여 은근히 노파심이 생깁니다. 새로은 세대들은 이미 언어를 극단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말이죠.

- 김양헌/ [현대시]2005년 12월호, 올해의 시를 말한다, 좌담에서.



한국문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비판과 논쟁의 부재이다.
문예지를 내고 있는 어느 큰 출판사가 있다고 하자.
그 문예지를 주요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 평론가는 그쪽 출신 시인·소설가에 대해 비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장사가 되어야 하므로, 책이 안 팔리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거다.
자기 울타리 내의 시인·소설가에 대해서는 후원을 아끼지 않고, 울타리 밖의 사람은 제 아무리 좋은 작품을 써도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학연과 지연, 문예지 인연 등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애정 어린 비판조차 하지 않는 것이 우리 문단의 오랜 관행이자 묵계이다.
여기다 몇몇 문예지의 권력 남용도 개탄할 일이고, 시인의 자기 갱신 없는 동어반복도 한심한 일이고,
일부 평론가의 편견과 게으름도 심각한 지경이다.

글쎄...... 내 능력으로 진단을 하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서구에서 그렇듯이 시 독자는 계속 줄어들지 않겠는가?
시단에 별다른 쟁점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좋은 시는 여전히 많이 보인다. 시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지금보다 점증되었으면 좋겠고,
시인들도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서정시 계열의 작품만 어느 문예지에서나 넘쳐나고 기상천외한 실험시나 이웃의 아픔을 보듬으려 애쓰는 민중시가 안 보여 개인적으로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개성이 두드러진 시인도 별로 보이지 않는 듯하다. 문화의 발전 속도와 문명의 발달 속도를 문학이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도 일반인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줄어들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 이승하 / [시산맥] 동인과의 대담 중에서


아직 기억되지 않은 낯선 이름의 신인들은 독자와 평론가의 일별 앞에 본의 아니게 '각인의 경쟁 상대'가 된다. 그러나 각인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인들의 작품이 각인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뛰어나거나, 독특하거나, 유달리 감동적이거나, 새로워야 한다. 시적 완성도, 내용, 형식, 미학 등의 어느 한 면에서든 각인될 만한 결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글의 대상인 12명의 신인들의 시는 아직 각인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시 경향과 화법에서 기존의 시와 뚜렷히 변별되는 점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둘째, 이미지 묘사에 지나칠 정도로 공들이는 대신, 그 이미지의 심층에 깊이 있는 사유를 저장해 두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 즉 불투명하고 관념적인 이미지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 셋째, 대체로 자의식의 과잉에 사료잡혀 있다는 것.
다르게 말하면 이들의 시는 최근 우리 시의 몇 가지 경향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수이 / 2005년 등단신인 신작시 읽기에서 / [현대시] 2005년 11월호



19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는 한국문학을 급격한 탈정치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했지만 산적한 현실문제에 대해서 작가, 시인들은 침묵했으며, 논리와 이론의 자기 재생산을 통한 문단권력의 비대화만을 초래했다.(중략)
문학의 환경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러한 변화에 주목하고자 하는 논의들이 우리문화를 얼마만큼 살찌우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식의 과대포장, 권력화를 통한 담론의 지배 등이 횡횡했던 시간을 기억하기란 유쾌하지가 않다. 문학적 진정성에 대한 갈망이 시대착오적으로 보였으며, 이론적으로 읽히는 작품만이 집중적으로 조명되기도 했다. 가령, 진보적인 담론 가운데 하나인 생태주의 역시 '닮고 싶은 욕망'을 자아내는 권력의 부랙홀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어떨까. 탈중심의 논리가 어느덧 권력을 향한 중심의 언어로 탈바꿈하는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 깊이 있는 진단이 없었다는 것도 반성할 대목이다. 작품과 작가, 시와 시인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논의로부터, 고민하지 않고 쓰는 시인이 양산되고, 문학 외적인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오류가 탄생한다.

- 한원균 / [문예연구] 2005년 가을호



내 머리맡에 놓인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알 두 쪽은 달렸는데 남자가 없다. 대쪽같은 기개가 없다

한 때는 사상이니 이념이니 더운피를 개천에 풀어 저잣거리에 이름값이라도 한 모양인데, 요즈음은 신변잡기 파리채 놀음이나 다름 없다

作爲만 있고 行爲가 없다. 活語? 라면 살 저며 등뼈 내놓고 초고추장이라도 튀어야 할 게 아닌가

가끔 언어를 비틀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성찬을 베풀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개다리소반에 찬밥이다

시인의 모자를 쓰고 보니 어깨가 자꾸 움츠러든다. 걸음걸음이 조심스럽고 그림자조차 더 낮은 곳으로 눕는다

언데부턴가 나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되어간다. 목 비틀린 채 땅바닥에 헛바퀴 돌고 있는 외뿔풍뎅이다

세상의 저녁, 어느 한 불빛이 내 시를 읽고 있는가? 우리가 상한 날개 껴입고 헛춤을 추는 것은 아직도 더 추락할 꿈이 남아있음이라

- 이영식의 <백치시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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