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문학 참고서재

침묵의 행로 / 이승원

by 솔 체 2014. 10. 24.

침묵의 행로

이숭원(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교수)




어지럽고 너저분한 세계에서 눈을 돌려 아늑하고 정갈한 정경을 보고 싶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지나가는 이 잔혹한 시간의 행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릴없이 녹초로 만든다. 육신이 흐느적거리도록 피로할 때 정적의 순간이 애인처럼 그립다. 정적의 순간을 언어로 포착한 시가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 때가 있다. 강인한의 「오후의 실루엣」(『시인세계』2007년 겨울호)은 그러한 신비로운 체험을 안겨준다.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
카페 손님이 그래서 많다

당신은 내 앞에
떠 있다
강이 있고
건너편에는 내가 떠 있다

우리들은 하반신이 지워진 채 마주앉아
앞에 놓인 강에
뛰어들 것인지 말 것인지
오래 들여다본다

지워진 다리들이
비가 내리는 산책로에 우산을 같이 쓰고
가만가만 걸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걸음을 멈춰 마주보고 있을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담배 두 대, 커피 한 잔
그리고 오후의 카페를 나선다

언젠가 비가 왔고
비에 젖어 눈을 뜨던 길들이
소리 없이 등뒤로 사라진다
―「오후의 실루엣」전문


이 시의 구도는 독특하다. 시인의 상상력은 비구상 회화처럼 여기 있는 공간을 잘라 저곳에 배치한다. 당신과 내가 마주앉아 있지만 그 사이에 강이 있다. 강 이쪽과 저쪽에 당신과 내가 떠 있다. 진정 그러하리라. 담배 연기 가득한 카페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지만 연기의 강을 사이에 두고 차안과 피안으로 갈라져 아득한 거리감을 느낀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마주앉아 있는 우리의 하반신은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으로는 보행하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인다. 마치 우리의 가려진 다리가 창밖에 돌아다니는 것 같다. 의자에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다른 일을 몽상하며 거리를 헤맨 일이 어디 또 한두 번이었던가.
결국 모든 정황은 무로 돌아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신과 나는 강의 차안과 피안으로 돌아선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시행은 "담배 두 대, 커피 한 잔"으로 요약되는 무위의 시간의 무정한 흐름을 체험한 자아의 담담한 발성이다. 무엇이 오고 또 무엇이 갈 것인가. 사실은 아무것도 온 것이 없고 어느 것도 간 것이 없다. "언젠가 비가 왔고" 또 그렇게 비에 젖은 길은 "소리 없이 등뒤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번잡한 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미세한 기미를 포착하여 한 편의 시로 응축해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시인이다. 이 시는 실체를 가린 실루엣이 투명하게 변하면서 허공으로 증발하는 그런 신비의 순간을 체감케 한다. 그 침묵의 눈길은 이제 또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내가 떠 있고 당신이 떠 있는 시간의 강을 따라 소리 없이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침묵의 파문만 남기면서.

―'이 계절에 읽은 시' (『문학의 문학』2008년 봄호) 에서


----------------
이숭원 / 1955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6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저서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감성의 파문』『폐허 속의 축복』『원본 정지용 시집』『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등이 있음. 현재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