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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인 문 학 상

제21회 《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_ 하정은, 이영애

by 솔 체 2014. 10. 28.

제21회 《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_ 하정은, 이영애

희망세탁소 (외 4편) / 하정은



어제의 남루한 얼굴을 싸들고
그대를 만나러 간다
멱살 잡혀 구겨진 생의 깃마다
식은땀이 저리고
바랜 옷자락마다 빛을 잃은 별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곰팡내 나는 알리바이가 가득 스민
허리춤 속주머니에서 돋아난 날개가
거침없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날마다 바지가랑이 언저리에서
은밀하게 발기되는 허구를
다리미로 시뻘겋게 누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너덜거리는 부리를 하고
풀섶으로 걸어나온다
그대는 내 진실 속에 묻어둔
캡슐을 깨뜨려
깃털처럼 마른 넝쿨을 잘라낸다
나는 날마다 어김없이
피워 올린 때묻은 슬픔을
그대의 혹독한 기계음으로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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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 메일



동굴 속의 박쥐 떼가
흐린 눈으로 천장을 배회했어
토막 난 기억들을 불러모으고
잇달아 목적지의 오류가
안개 속으로 깃발을 흔들며 달렸어
끝없이 펄럭이는 내 젊은 날의 욕망이
시퍼렇게 여린 가슴을 파고들어 왔어
고향집 뜨락에는
을씨년스레 흰 팻말들이 꽂히고
소금기 서린 치자꽃 사잇길로
질박한 어머니의 개짐이
구멍 뚫린 폐가의 벽을 질러
나뭇가지마다 흐드러지게 매달려 있었어
드디어 아카시아 향기가
추악하게 출렁거리고
좌회전 받은 길들이 휘청거렸어
사정없이 물러가며 어긋나는 교차로가
균형 잃은 몸짓으로 헝클어졌어
악의적 메들리가 저장되고
하염없이 울부짖는 그대 창문이
잘못 전송된 메시지로 덜컹거렸어
정지음을 무시한 길들은
이제 깡그리 무너지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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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계



아버지가 흔들리는 내 등뼈 어디쯤
터널을 황급히 빠져나온다
아린 사과들이 몰래 과원의 바닥으로
붉은 얼룩들을 물어 나르며
더러는 가장 여린 가지에 매달려 웃고 있다
그 해 여름 넝쿨장미가 꽃잎을 다 떨구더니
깡마른 가시를 치켜들고
교회 첨탑을 기어올랐다
섣불리 기록된 절망들은 세상의 이마에
검은 반점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 있다
일당 몇 푼에 혼신을 다한 육신
고통의 부위마다 주름을 잡으며 울어댄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뉘인 굽은 허리를
은빛 피라미 떼 같은 햇살이 휘돌아 나온다
아직도 세상은 열기로 가득하고
어긋난 길이 저만치 등을 보인다
젊은 날 그 짧은 초췌한 영광이
칠흑의 생애를 달려와 잠 못 드는 자정
아버지와 아버지가 포개지고
토막 난 아버지의 꿈이
쉴새없이 째각거리며 방 안을 빙빙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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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로 근처



밤이 깊어갈수록
이별이 가까워옴을 안다
헛기침이 잦아지는 새벽이 오면
허수아비는 허망한 상념에 젖고
초경에 든 나무들은 자꾸
붉어지는 얼굴을 흔든다
만삭이 된 벼들이
시린 발목을 논바닥에 깊이 묻고
머리 조아려 독경하는 동안
새들은 세차게 깡통을 두들긴다
여름이 기울어지는 울타리에서
탱자나무는 몸에서 빠져나간
서러운 열매를 그리워한다
싸늘한 내 아랫도리를 데우며
허망한 열기를 내뿜던 땅은
이제 풀무치의 공허한 울음으로 가득 찬다
시월 열아흐렛날 하현달을 비켜 가는
눈먼 장명등 하나
골목 끝자락에 홀로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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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고등어



어머니같이 깡마른 몸매로
고등어 한 마리 연립주택 옥상에 걸려 있다
간 쓸개 다 빼 던지고 독한 간수에 절여진 채
복수까지 차오르는 비린내를 길어 나른다
싸늘한 살갗에 배어드는 꿈이
시리도록 그리운 바다를 회처럼 엷게 저며낸다
텅 빈 뱃속을 더듬던 햇살이
앙상한 갈비뼈에 걸려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다
물기 가신 거친 등판에서
기울어져 가는 더운 별 하나 저 혼자 멀미를 앓는다
무늬 없는 생애의 중심에서 비바람이
폭죽인 양 터지고 은빛이 닳도록 뛰어오르는 슬픔
허공을 향해 끝없이 하늘거린다
버려진 내장 언저리에 돋아난 소금꽃
언젠가는 닿을 넋을 향해 길을 낸다


▲ 하정은 / 1960년 경남 양산 출생. 동서대 문학아카데미 수료. '시와 관객'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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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초상* (외 4편) / 이영애



시간의 간극은 깊고도 넓다
다급해진 발자국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한밤을 흔든다
나간 심장을 겨우 불러들여
응급실 산소마스크에 생을 의지한 여자
그녀 옆을 지키는 풀벌레가
화면 속에서 간간이 울고 지나간다
의식을 떠난 통증은 굳게 닫혀 있다
생각, 몸놀림, 모두 통화불능
벼랑의 끈을 놓은 듯 그녀는 평온하게
뜻 모를 바닥으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다
어스름 동굴 술렁이는 빛깔 따라
막막한 동공엔 박쥐들이 날고
몸 속 푸른 이끼의 날들 길게 감겨 나온다
마알간 이슬방울처럼 링거병을 타고
액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
붉은 물감으로 수혈 받은 살갗은 희다
버티고 있던 긴 목이 살짝 기운다
애틋한 사후의 눈빛이나,
눈부신 살결은 분리된 지 오래
웅크리고 헤매던 계절도 멈추고
바람 한 점 없는 벽,
사각의 틀 아이 울음만 가득하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는데
내 안의 미로, 출구가 안 보인다


―――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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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바닥
유리 속 환하게 비치는
발바닥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굳은살덩이
전복의 내력을 읽는다
흔들리지 않으려 바위에 붙어
질질 끌고 다녔을 바닥,
뒤꿈치에 거무스름하게 금이 가 있다
헛발 한 번 디뎌본 적 없는 기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유리
유리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
그 얇은 간극에 예리한 칼날 들어와
그제야 바닥은 바닥을 놓는다
너무 환해 보이지 않던 이승 길
살아 한 번 읽어본 적이 없던 아버지
유리 속 창백하게 누워 있을 때
처음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세히 아버지의 바닥을 읽었다
수의 한 벌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질마도 갯바위를 떠돌던 걸음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발바닥 실금 사이로
거칠고 비탈진 길들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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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물다



겨울을 견뎌온 적막한 동굴에서
저렇듯 우글우글 소음들이
분열되고 있었던 거다
어둠의 그늘에서 속으로 삼켜가던 것들
미끈한 몸뚱이 똬리 풀고 덤벼들 기세다
목젖 열고 날름거리는 혀들,
돌아올 회문(回門)도 없이
벌어진 틈새 민첩하게 낚아채고 있다
수풀 가로질러 발 없이 천리를 간다는 혀
더듬거리지도 않고 목에 힘줄 세우면
푸른 살 비늘이 돋아난다
쉭쉭 일으킨 바람은 휘어진 길을 지나
속도를 타고 날카롭게 쏟아지는
시선의 끝,
붉고 푸른 부호들이 출렁거리자
갈라진 혀가 허공을 가른다
거침없이 휘두르는 시퍼런 칼날
먹혀본 사람은 안다
귀 없는 아가리의 늪
얼마나 깊고 강한 독을 가졌는지
내 혀에 네가 물리고 네 혀에 내가 물려
허물까지 벗어놓고 스르르 미끄러지는 배후
말꼬리를 잡으며 사그라지는
서늘하고도 텅, 빈,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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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부드러운 살 스칠 때마다 달콤한 냄새 나른하게 흘렀다. 이스트 반죽처럼 부풀어오르던 향기 속 비집고 들어온 애벌레, 온몸을 꾸물꾸물 휘젓는다, 실핏줄 터지며 허공 속은 양수처럼 흔들리고 한여름 시름시름 앓으면서 속내 드러내지 않던 몸, 견디다 못해 흐물흐물 짓무르고 있다

내가 빠져나온 몸 속 자식 넷 열고 닫았던 자궁, 적출한 어머니 뒤척일 때 따라 뒤척이고 누울 때 따라 눕던 내 오랜 관계도 끌려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소리 없이 사그라지는 태초의 꽃잎, 정오를 지나 등이 휜 오후 3시, 어머니의 시계 초침은 오늘도 버겁게 뛰고 있다. 희붐한 기억의 전설 속으로 저물어가는 문장들, 가랑이 사이 점점 벌어져 뒤뚱뒤뚱 허공을 딛고 있다, 한여름 환유처럼 흐르던 시간들 뭉텅 삭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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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벽화



내가 거울을 보고 잇다
이십오만 년 어둠 속에서 생성된 붉은 동굴
계류는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며
등고선의 길을 타고 내려가고 있다
내가 담긴 자루 속,
잊혀지지 않은 미각의 퇴적층들은
스스로 윤회하며 녹아내리고
소화불량으로 진물 나던 상처
밤낮을 흔들며
통로를 따라 진화하는 중이다
조그만 신경에도 변색하던 붉은 잎사귀
미세한 실핏줄을 따라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거울은 조그만 흔적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샅샅이 동굴을 살핀다
긴장 속에 핀 꽃,
불현듯 밀려드는 흉터 자국
뒷골을 확 잡아당긴다
아름다운 꽃도 오래되면 독을 품는 걸까
새벽부터 빈속의 통증으로 피우던 꽃
꽃피고 지고 몇 번의 해를 거듭하다
내시경이 보내온 화면 속
몇 장의 오래된 꽃잎은
날개를 오므렸다 폈다
검은 나비가 된다


▲ 이영애 / 전북 남원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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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심사기

시대와 서정, 시적 상상력의 힘 느껴져



하정은 씨의 「희망 세탁소」외 9편과 이영애 씨의 「여인의 초상」외 12편 작품을 《열린시학》 2009년도 상반기 신인작품상 당선작으로 민다.
하정은 씨 작품은 현대인들의 우울한 초상이 탄탄하게 형상화되어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희망 세탁소」에서는 세탁소에 맡겼음직한 옷가지들에서 남루한 생을 읽어낸다. 허리춤 속주머니에는 "곰팡내 나는 알리바이"가 있고 바지 가랑이 언저리에는 "은밀하게 발기되는 허구"가 스며 있다. 이 애정은 「스팸 메일」에서는 현대문명의 비판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아버지의 시계」에서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뉘인 굽은 허리"의 "은빛 피라미 떼 같은 햇살"로 상승하기도 한다. 시대와 서정을 아우르는 힘이 느껴진다.
이영애 씨 작품은 내면을 축조하는 시적 구성력이 돋보였다. 「여인의 초상」에는 모딜리아니 그림을 보면서 이를 응급실에 실려가는 한 여자의 내면과 연결하고 있다. "의식을 떠난 통증", "통화불능", "기우는 목", "아이 울음" 등의 화소들은 시 속에서 재구성되면서 한 여자가 겪었음직한 아픔들을 내밀하게 직조해 낸다. 「발바닥」에서는 아버지의 내력이, 「혀를 물다」에서는 현대인들의 언어적 폭력이 시적 상상력 안에서 재창조되고 있다. 시적 대상을 제어하는 상상력과 만만찮은 호흡이 주목되었다. 두 분 모두 정진하여 우리 시단을 빛내주길 바란다.
김삼경, 예외석, 박승일, 이문희 제씨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거론되었지만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 심사자 : 이상국, 정일근, 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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