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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이장욱, '밤의 연약한 재료들'에 대하여 / 전동진

by 솔 체 2014. 11. 11.

이장욱, '밤의 연약한 재료들'에 대하여 / 전동진

밤의 연약한 재료들
이장욱



밤이란 일종의 중얼거림이겠지만
의심이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이겠지만

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맹세를 모르고
유연하고 겸손하게 밤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중

죽은 이의 과거가 빈방에서 깊어가고
소년들은 캄캄한 글씨를 연습하느라 손가락만 자라고
늙은 개의 이빨은 밤마다
설탕처럼 녹아가는데

신축건물들이 들어서자
몇 개의 골목이 중얼중얼 완성되고
취한 남자는 검게 그을린 공기 속을 흘러가고
밤은 그의 긴 골목이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드디어 외로운 신호처럼
보안들이 켜지자
개의 이빨은 절제를 모르고

갓 태어난 울음들이
집요하고 가득한 밤을 향해
오늘도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

― <현대문학>, 2월호





이런 저런 색을 섞다보면 결국엔 검은 색이 된다. 밤의 어둠도 시인의 숫자만큼 다양한 재료들로, 다양한 방식에 의해 구성되었다. 어둠의 농담도 다르고 그 어둠을 배경으로 빛나는 빛의 스펙트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근대시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주요한의 「불노리」나 김동환의 「국경의 밤」도 그런 수많은 밤들 중의 하나이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빛보단 어둠이 안식이 되기도 한다. 가난하고 못난 무수한 생들이 야반도주하는 밤들도 있다. 또 멀지 않게는 특이한 밤, “군용파커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이를 업은” ‘사내’가 ‘휘적휘적’ ‘어디로 가’고 있는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기형도의 ‘무서운 백야’도 있었다.

연약해지기 전에 밤은 귀(鬼)의 시간이자 신(神)의 시간, 즉 두려움과 경외의 시간이었다. 백석의 시 「고야(古夜)」는 이런 밤들을 아주 잘 그리고 있다. ‘두려운 밤’, ‘조마구가 나오는 무서운 밤’, ‘막내고무와 엄매가 이불 바느질을 하는 즐거운 밤’, ‘명절 전날의 흥청한 밤’, ‘냅일날 약눈을 받는 신성한 밤’들이 그것이다. 기존의 시에 드러난 밤들은 시인의 말과 같이 기도처럼, 주문을 외는 것처럼 ‘의심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밤’은 어떤가. 밤은 이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 ‘부정’은 밤이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이다. 강제된 것이라기보다는 자포자기의 부정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밤의 ‘유연’과 ‘겸손’은 쓸쓸해 보인다. 우리에게는 ‘연약하지 않은 재료로, 색들로 깊어진 밤이 있었다. 이런 중후하고 농후한 밤의 회복은 가능한 것인가.

시인의 전망은 밝지 않다. ‘죽은 이의 과거’, 그 밤들은 관과 같은 ‘빈방에서 깊어가’고 있을 뿐이다. ‘소년들이’ ‘연습’하는 ‘캄캄한 글씨’ 곧 문학이랄 수도 있겠는데, 이것들은 아트art도 아니고 크래프트(craft)에도 미치지 못하는 다만 스킬(skill)일 뿐이다. 삽질이나 괭이질은 내던진 힘을 잡아채줘야 한다. 그러니 손은 매듭이 굵어지고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힌다. 이런 것과 다르지 않게 전락한 ‘글씨 쓰기’는 선을 길게 늘여가는 것일 뿐임으로 ‘손가락’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야말로 태생은 개였으나 그 ‘개성’은 ‘설탕처럼 녹아’내리고 있다.

구비구비 굽어도는 구불길이라야 어둠도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한껏 깊어질 수 있다. 그렇게 깊어진 어둠만이 두려움을 담고 또 신화까지도 담아 낼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길은 어떤가. 시인의 말처럼 육면체의 ‘신축건물’이 들어선다. 직선의 건물을 담장 삼아 만들어진 골목은 역시 반듯할 수밖에 없다. 어둠이 웅크릴 수 없는 골목에서는 ‘귀(鬼)’도 ‘신(神)’도 쫓겨난 지 오래다. 이런 골목은 ‘취한 남자’의 중얼거림만으로 채워질 뿐이다.

그러니 오늘의 밤은 얼마나 ‘연약한 재료’로 이루어졌는가! “드디어 외로운 신호처럼/보안등이 켜지자/개의 이빨은 절제를 모르고” 녹아내린다. 고요한 밤에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하면 어머니들은 귀신이 도는 모양이라며 이불을 덮어주었던 밤이 있었다. 신성을 박탈당한 밤은 다만 도둑과 강도와 불한당들의 은신처를 제공할 뿐이어서 ‘보안’에 의해 내쫓김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시인은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밤은 “갓 태어난 울음들이” “집요하고 가득한 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의식의 주체, 낮의 주체는 이미 자본의 논리에 의해 그 ‘이빨’을 상실하고 말았다. 무의식의 주체, 밤의 주체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갓 태어난 울음’ 그것은 ‘상상계’나 ‘상징계’ 이전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울음일 터, 그 실재계로부터 전해오는 ‘이빨’을 ‘오늘도’ “필사적으로 세우”는 일이 곧 시인의 임무는 아닌지 묻게 된다.


전동진 | 문학평론가.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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