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하반기 제11회 문학선 신인상 _ 임승환, 정선아
죽지 않는다 (외 4편)
임승환
구아나후아또 미라박물관*
매표소로 향하는 긴 줄은 가난을 보러 가는 중이다
세월이 낸 주머니만한 구멍을 깡통처럼 달아매고
한 남자가 내게 구걸을 한다
호주머니 속 동전을 그에게 건네며
대문이 떨어져 나간 어제 속으로 스민다
1달러가 조금 넘는 출산 비용을 걱정하여
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산통을 겪는 여인의 한숨이 있다
배고픔에 징징거리는 소리가
두 아이를 보듬은 엄마 품에서 울린다
폐광된 막장에서 또 수천 년이 지나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광부들의 손놀림이 서걱거린다
가난은 무덤에서조차 버림을 받고 살아 움직인다
가난을 통째로 썩히기 위해
배 속의 태아와 함께 땅으로 돌아간 여인들
건조한 멕시코 바람으로 발에 밟힌다
처음부터 그들은 배우였나
산 사람들이 입장권을 팔고 있다
*묘 사용료를 지급하지 못해 파헤쳐진 시체 중 토양과 기후에 의해 자연 미라가 된 것을 전시한 박물관.
계요등
임승환
누렇게 떠서 허름하게 닳아진 등,
구멍이 숭숭 난 가슴으로 날달걀을 품은
여자를 알고 있어요
모기떼 윙윙거리는
달라붙듯 고인 빗물 한 움큼에
여름 내내 줄타기하는 덩굴식물
누구 없나요?
열꽃이 피네요
땅을 차고 갓 일어난 어린 싹이
허덕이고 있어요
선풍기를 달아 주세요
찬물을 주세요
지지대를 움켜쥔 욕망과 집착에
30년을 받쳐온 몸뚱이는
삭아 문드러지는 노끈으로 허공에 돌기 시작해요
푸른 옷을 입혀 주세요
시어머니가 노을 밭에 서 있어요
미완성
임승환
시침질로 이어 온
내 삶은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어
손끝마다 바늘땀이 새겨진 엄마 무르팍에 앉아
졸린 눈을 밤새 비벼도 보고
여학교 가사 시간
재봉틀에 몸을 맡기어 청순함을 지어도 보았지
어느 날인가
2.0 시력에도 보이지 않는 광속의
미싱 바늘로 두 번이나 오가며
일생의 브랜드를 박아 넣었어
안팎을 뒤집어 봐도
칼끝 같은 재봉선만 보이자
나도 여자가 된 모양이야, 안도의 숨을 쉬는데
매듭 풀린 밑실이
국숫발처럼 끝도 없이 풀려나오는 거야
허공 속을 가로지르는 실밥들은
풀리지 않는 무한 신호를 지금껏 내게 보내고 있어
날이 새면 얼룩이 진 시침질
날이 새면 다시 시작되는 시침질
이매*의 춤
임승환
설핏 낮잠에서 깨어
급한 일 본 후 진저리치는 몸
반쯤 잘려 나가 가슴이 죽은 나무에 내려
안식을 구하는 피곤한 햇살이 흰 이를 드러낸다
세상에 칼집 같은 소슬한 틈을 내어
비틀거림으로 일상을 웃겨 보려다
엉덩방아를 찧는 신음
방울로 맺힌 눈물이 뚝뚝 소리를 낸다
“왜 나라고……”
말줄임표가 따라다니는 가을 해설피
버둥거림도 꽃인가, 춤이라면 춤인가
* 안동 하회별신굿 속 바보로 등장하는 인물.
∡43과 ∡43.1
―그 작은 차이
임승환
갯벌 위에 집을 지었다
열 개의 게 발들이 움직일 때마다
집도 조금씩 따라 움직인다
그늘도 쉬고 있는 느티나무 아래
한 발을 남겨 둔
아홉 개의 발이 닳아지도록 걷고 있다
꿈은 출렁거린다
밤은 사랑과 일과 휴식들이 튕겨 나온
어긋난 각들의 무대
일치하지 못한 선은
서둘러 달빛의 그림자를 풀어 몸을 섞는다
새벽은 또 다른 이름의 정거장에서
두고 온 한 발이 실려 오기를 기다린다
햇빛을 이고 가는 한 뼘도 안 되는 지붕
서둘러 떠나는 출발선은 같지만
늘 눈감을 수 없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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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라디오 (외 4편 )
정선아
생산년도는 모른다
스피커 구멍 사이로 10년씩 20년씩
모래바람이 들어차 있을 뿐이다
전파를 타고 왔는가 사우디에서부터 불어온 바람
주파수는 끊긴지 오래다
언제부터인가 소리의 문턱이 얕아지더니
이제는 메말라 하늘 높이 안테나 찔러 보아도
모래알 갈리는 소리만 난다
청소할 때 오래 외출할 때
인기척 내려고 내다 버리지 못한 사우디 라디오
와삭 카세트테이프 물고 까만 혀 날름거리며
사탕처럼 빨아먹는 음악
시끄럽다고 이빨을 누르기라도 하면
부르르 떨었다 비명을 질렀다
한번 빠진 턱은 잘 오므려지지 않았다
파르스름 하현달 뜬 새벽에도 건지대 동물처럼 우우 울어
사암 하나 가져다 풍치에 괴어 주니
잠잠해지기가 무섭게 테이프 하나 꽉 물고
수도자처럼 입을 벌리지 않는다
얄라숑, 샬라숑 먼지의 공백 사이로 들려오는 차드라, 차드라
악다구니 쓰는가
나사를 풀어도 덫에 물린 테이프
단물 다 빠지고 쓴물만이 무한 재생
누군가 녹음 버튼을 눌렀는지 스스로가 눌렸는지
우리는 노래를 부르다가
지금이 몇 시야 고함을 치다가
기침을 삼키다가
저 혼자 이빨 자국 곱씹으며 공회전하다가
8월을 건너
정선아
아스팔트 바닥에 지렁이가 눌어붙어 있다
찢어진 타이어 표피처럼
굽이진 길 따라 S자 모양으로 움츠러들었다
이름부터가 꾸부렁꾸부렁 언덕을 기어오르는
지렁이
쏟아지는 빗줄기 맞으며 무단 횡단하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바퀴에 절편 되었다
8월에 내린 빗물은
땅속으로 스며
이제는 탁한 증기만 자욱한
바닥에 귀 대고
지하수 흘러가는 소리 듣고 있다
팥국수처럼 유들유들했던 살점
진득하게 뜯길 때까지
감내(堪耐)가 내감(內感)이 되어
짓눌린 제 속 까매질 때까지
수십 개의 허리띠 꽉 졸라
마디마디 바퀴살 새기며
다시 비가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저 몸 퉁퉁 불어나면
8월을 건너
축축한 흙 속으로 돌아가려고
전동차는 기억을 품으며 달린다
정선아
당고개역에서부터 비가 내렸다
삼천 원짜리 우산 대신
삼천 원어치의 산성비에 젖은
신문지 사이로 활자가 흘러내린다
쇳내 번진 전동차
창밖으로 되감기는 영상 속에서
결석(結石)처럼 굳어 버린 기억을 채석해
물수제비뜬다
레일에는 누군가가 버린 기억이
그득하게 쌓여 있다
오래전 이곳에는 강물이 흘렀을 것이다
이제는 흔적만 흐르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증발된 기억을 더듬느라
사방 온통 흐려진다
빗물 고이지 않도록
전동차는 기억을 품으며 달린다
쇳조각 이어 붙인 배로 온기 품어 주려고
그렇게 몸이 길어졌다
갯내 실린 비 내리는 오이도역
텅 빈 전동차
저 멀리 푸른빛 점멸하는 고개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칫솔
정선아
칫솔모에 돋아난 산호초 가닥가닥
너의 갯내가 묻어난다
아치형으로 조각된 대문니를 열고
해저동굴에 들어서니
입안 가득 바닷물이 차오른다
태풍이 몰려왔다 몰려갔던 습곡을 지나
살짝만 스쳐도
통증이 실금처럼 번졌던
이제는 허공만 남은
사랑니 있었던 자리
거세게 협곡이 일어났던
지금은 어두컴컴하게 비어 있는
네 인생의 어느 한곳
바지런히 쓸어낸다
부식돼 가는 아밀감에서
선득한 쇠붙이 맛이 난다
그늘로 젖어 있는 입안을
오래도록 헹궈 낸다
뱉어진 파도가 개수구로 빨려 들어간다
해질녘 육풍(陸風)에 이가 시리다
이빨
정선아
둔탁한 칼날이
절벽처럼 모가지를 쳐낸다
투신하는 광어
모래알 같은 눈알로
저에게서 발라내진 껍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둥아리를 쩌억 벌려
허공에 입질을 한다
비어 버린 뱃속이 쩌렁쩌렁 드러난다
눈을 가려 주면 어떨까 손을 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살점을 드르륵 박아 버린다
빨간 자수를 아로새기고 나서야
박힌 이빨 빼내는
광어의 독은 사나워
生이 빠질 때까지 피를 짜내야 한다
광어 등처럼 축축한 어시장 바닥
물기는 증발되고
의식(意識)만이 허옇게 말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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