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시인세계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물 위에 지은 집 (외 4편)
이 갑 노
찻잔을 앞에 두고 녹차를 우려내듯 앉아있다
오래된 기와집엔 글씨가 살고 있지
물거울에 잠긴 소나무 물구나무선 그림자
지상의 높은 우듬지가 밑바닥에서 새를 키우고 있어
시원한 물소리는 맨살을 뚫고 흐르는데
연못에 고인 물은 목이 말라 낙수에 입을 여네
담장 안 늙은 배롱나무 줄기로 쓴 저 글씨가 우암체?
기가 돌아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격자문 열어두고 산빛마저 속속들이 우려내면
심연 속 푸른 숲이 푸시시 깨어난다
우암이 옛날 조선 적 사람인 줄 알았더니
퇴색한 정원에서 이웃들과 살고 있다
다음에 고택을 방문할 때는 빈집이라도 반드시
헛기침이라도 해야 한다
물 위에 지은 집은 길 위에 몸 같은 거
앉았다 일어서는데 발목에서 문 여는 소리, 뼛속까지 열어 보이던
나무기둥이 뚜드득 화답한다
만약에 불이라도 난다면 사리 몇 개쯤 남고
맺은 인연 탁해진 심정에 흰 수련꽃으로 피겠다
멀리 배웅하는 인기척…
귀가길, 걸립乞粒한 차茶 한 잔이 온몸을 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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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 켜
은행나무 물고기 산란하듯 잎 털어낸다
떨어지는 잎들 울고불고하지만
나무 몸 부르르 떨어 노란 잎들 뭉텅 털어낸다
집 알아보러 간 아내를 기다리며
나무와 함께 서 있다
겨울 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
나무는 아직 닫지 않은 문틈을 통해 나를 불러들인다
몸속은 등화 관제하는 집처럼 캄캄하다
완벽한 성이며 요새다
불씨 하나 없는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구멍 막는 일
곰처럼 겨울잠 채비를 한다
방금 전 추워서 샤크존에 들렀다
그곳은 아직 가을이 살고 있다
나무들도 몹시 추울 때는 인근에 있는 빌딩으로 피한 간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초대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심장이 있어 좋다고
따뜻한 난로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겨울은 나무에게도 추운 계절이다
산골에서 문풍지 하나로 겨울 나던 우리 식구들
생나무가 우리를 지켜준 은인
아궁이에서 타닥 소리 내거나 입에 거품 물기도 했다
아내가 밝은 얼굴로 어둠을 건너온다.
내 가지마다 숱하게 매달린 나뭇잎들
이제 힘겨워 털어낼 때가 된 것 같다
겨울이 다가왔다
나도 나무처럼 몸 부르르 떨어본다
아내와 나 나무의 도움 받아 밤새 구멍 막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이주해온 나무들은 떨켜를 만들지 못해
각별히 신경 써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거라고
은행나무 내 어깨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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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늪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늪으로 태어나 산다고
처마 밑 풍경은 속삭여 주었지
밤새 입에서 시작된 강은 꾸룩 소리를 내며 흘러갔어
새벽에 일어나 보니 첫눈이 내렸어
나는 아파트 옆길을 걸어가네
나보다 앞서간 발자국 희미하게 찍혀 있네
야구르트 리어커처럼 작은 수레를 끌고 간 발자국
일렬로 길게 난 자전거와 사람의 발자국
나는 새 길을 가다가도
위험한 길에서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네
눈이 녹고
길에는 그들의 발자국만 얼음조각으로 박혀 있어
나는 신발 무늬를 보고
그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하네
밤사이 하늘이 내게 내려와서 늪으로 변한 길을 덮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갈켜 주었어
새들이 날아가며 한번 입력된 길은
유전자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아
늪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어
여행길이 죄다 입력되어 나중에 갈 수 있게
바람의 발자국은 눈 위에 무늬처럼 남아
눈길을 지워버렸어
눈길은 밖으로 이어졌어, 늪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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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공증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너무 뚱뚱해서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지
어리석은 마음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새들은 뼛속에 공기주머니가 있어 몸을 가볍게 하거나 척박한
공기 중에서는 공기주머니에 있는 공기로 숨을 쉰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중풍에다 골다공증을 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고 새가 우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새가 되려는지 등은 활처럼 굽어지고
다리는 북어처럼 마르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새처럼 뼛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려고 뛰어다녔습니다.
노력해도 생기지 않던 공기 주머니가 이제 생기려는지
뼛속에서 바람이 일고 소낙비가 거칠게 내리기도 합니다.
돌 속에 갇혀 있던 백로들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갑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나 봅니다.
몸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팔월 한낮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맛나게 먹고 있습니다.
아, 하늘에 있는 새들은 지상에서 숨겨온 동전 한 닢도 너무
무거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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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移徙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늘정원 대문에
풍경을 거는 일이다
이사할 새 집에는 먼저 이사 온 자작나무들이
마루를 깔고 있다
방문은 조막손을 내밀어 잘 지내보자며
악수를 청해온다
시베리아 추위를 녹이며 모여 있던 벌목꾼들이 보드카 냄새에 취한다
의사들은 말한다
암도 애인이나 부인처럼 껴안고 살아야 한다고
토굴 같은 수납장과 붙박이장을 열어 본다
집은 부엌 안방 건넌방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아내는 구석구석 앉은 먼지의 궁뎅이를 떠민다
여럿의 영혼이 드나들 것이다
주인 영혼은 안방에 못을 박고
세든 영혼은 건넌방에 액자를 건다
청파동 적산가옥부터 몇 번째인가 벗어놓은 집들이
아내는 솥단지 속에 요강을 넣어 안방에 들여놓고
오늘부터 이사를 왔노라고
성주신과 조왕신, 측신에게 고한다.
밖으로 나오자 딸랑거리며 닫히는 문
꺼내 놓았던 가구들이 하나 둘 제자리로 들어가
나의 내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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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노 1955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2002년 스포츠 서울, 월간 현대시 제정 제2회 한국인터넷문학상 시 부문 선정. 빈터, 현대시문학, 월간문학저널 회원. 현재 화승물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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