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제 11회『 詩로 여는 세상』신인상 당선작
빈집에는 아직도 새가 산다 외2편
이길연
이제는
도시로 변두리로 나앉은
허름한 집
지난날 추억 한 장을 들고 서 있다
마음 펄럭이던 시절
방마다 불 밝혀
고단한 하루의
헝클어진 매듭을 풀곤 했지
풍을 맞은 듯
언제나 기우뚱거리는 집
낮달 뜨는 지붕엔
잡초가 바람의 길을 쓸고
처마 밑 새들 둥지를 튼다
문패가 바람에 흔들리며
녹스는 집
뼛속으로 새들이 깃을 치는 날
아버지의 녹슨 자전거
길을 달렸지
낡은 문짝 사이로
세월은 펄럭이고
이승에 빈집으로 남아 허물어져가는
아버지
풍화된 여름날의 추억
상처 난 집이 세상 언저리
한쪽 풍경을 채우고 있다
새를 기다리며
경주박물관 뒤뜰에는
효수된 불상
대리석 위에 놓여 있고
주변에 목 없는 가부좌
부처의 미소가 일렁인다
험준한 세월 동안
육신 없이도 세상을 안을 수 있었는지
열반에 들었을
그 미소와 가부좌에 걸려
눈길이 머문다
빈 몸 하나로
해탈에 드는 나무들
그들은 얼마나 많은 걸 버렸을까
새 한 마리
강 건너로 날아간 후
헝클어진 도시의 길
나는 가부좌 한 번 틀지 않고
도시의 플라스틱 차양 아래서
뻔한 입만 달고 살아온 날들
불상을 마주하고도
해탈을 꿈꾸지 못하는 것을
잃어버린 미소를
마른 종이꽃처럼 피워본다
굴뚝새
변두리로 기운 다세대 빌라의
보일러실
창을 깨고 뻗어나 있는 연통에 빌붙어
둥지를 튼 새
굴뚝새
날마다 그림자를 이끌고 돌아오는
고단한 길
잠재울 방 하나 그립던 시절
지하 보일러실에 엎드려
비상을 꿈꾸었던
굴뚝새
봄빛이 깊어질 때까지 초록을 물어 나르며
연통에 문패를 걸어둔
초라한 둥지 속
어두운 창에 상처의 등불 내걸고
때 묻은 옷깃이
하루의 노동을 내려놓고
토막잠에 빠져드는 동안
꿈들은
젖은 날개를 퍼덕인다
날아오르는 새들은
허공에 길을 찍어 만들고
비 듣는 날이면
한쪽 무릎이 젖어 있는 길이,
알루미늄 연통에서 알을 깨고 나온
굴뚝새
이길연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고려대, 선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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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외2편
정재권
강아지가 두 눈 부릅뜬 채 중앙선 위에 쓰러져 있다
달려오던 차들이 잠시 머뭇거리다 지나간다
아침 햇살이 강아지를 길게 쓰다듬는다
동트기 전 어스름 녘 또는 해질 녘 숨어 있다가
불쑥 뛰쳐나오는 어떤 기미,
빛과 어둠의 틈새에 매복하고 있던 그 조짐
생의 중간 중간
빛의 각도나 바람의 방향, 소리의 행적 안
은밀한 반란을 잘 주시해야 보인다
오감과 육감을 곤두세워
시간과 공간이 겹친 내밀한 결 사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죽어서도 하늘을 향해
두 눈 부릅뜬다
매듭의 해석
웃옷을 입는데 단추가 떨어진다
실오라기가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는다
양 손에 힘을 주고 팽팽함을 유지하다
어느 순간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옷 안쪽에 움켜잡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매달려 있는 모든 것은 매듭의 고뇌로
형체를 유지한다
안으로 혹은 바깥으로 잡아 매어
그 사이를 옹골차게 하다가
때가 되면 세상에 풀어놓는다
미처 다 피지 못한 꽃봉오리 이파리에도
속이 꽉 찬 과일이나 씨앗의 끝에도
매달렸던 흔적이 있다
움켜잡은 손 놓고 또 다른 세상을 시작하는,
배꼽들이다
숫돌
숫돌에 칼을 간다
무딘 날이 갈을 세워
숫돌의 면을 갈며
소리를 낸다
수천 수만 년 물속에서
단단하게 굳은 결들이
긁히고 녹아
얇은 막으로 흘러내린다
숫돌은 한평생
무뎌져 말귀 어두워진 날을
자신의 뼈로 깎고 갈아
다시 세운다
호흡이 풀리며 말귀가 터진다
날이 선다
날이 시퍼렇다
나를 세운다
정재권 : 1961년 출생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GS칼텍스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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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개구락부 외2편
김명신
는개가 찾아오는 날엔 오래 기다려야 한다 대답이 없다고 서둘러 부르거나 발길질을 해대도 소용없다 무겁고 어눌한 눈들이 날카롭게 베고 지나가도 는개는 말짱하다 간혹 먹잇감을 향해 어슬렁거리는 늑대처럼 부라리는 눈동자를 만나다 해도 금방 순해지는데 이때는 외출을 삼간다
어린 땅꾼들은 는개 속 풍경을 마련하는 중책을 맡는다 어쩌다 칭찬을 듣는 날엔 장례행렬처럼 길고 아득한 산길에서 축축한 콧노래를 밤새 부르며 공포를 등에 업고 행여 차여 넘어지더라도 가장 깊숙이 내려앉기를 주저 않는다
학교 종소리에 회초리가 개입할 때야 어린 땅꾼들은 말 잘 듣는 학생이 된다 교문을 통과하는 여러 마리의 늑대개, 어수선한 몸부림이 저마다 숨겨놓은 곳에서 기상한다 는개가 키워낸 어린 땅꾼들의 살림살이가 학생부실 앞 땅 속에 묻혀 있다 누구는 그것 때문에 아이들이 영악해져 간다고 하고 누구는 병든 아버지들이 살아난다고 기특해한다
는개가 진득하게 내리는 시간엔 소문도 쑥쑥 자란다 학교 게슈타포 학생부장 선생의 뱀눈이 정찰을 시작할 때마다 그의 귀가는 빨라지고 내비 속엔 여러 아이들의 얼굴이 형체를 잃었다 얻었다를 반복한다 한 번 게슈타포의 대뿌리에 피멍이 들어본 아이들은 메두사도 두렵지 않을 학생부장의 머리를 기대하고 있다 거짓말처럼 학생부장의 온몸엔 어린 땅꾼들의 주먹만 한 멍이 저승꽃으로 피어났다
멀리서 마을이 세수하는 소리가 나자 학교 종소리는 어린 땅꾼들을 토한다 막대기를 휘저으며 습한 콧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귀가를 서두르는 는개 새로 계획한 작전을 엄숙하게 수용하며 고요한 잠에 싸늘한 뒷덜미를 맡기며 하나 둘 마을을 지워나간다
우산
비와 비 사이에 비는 한없다
나와 나 사이에 나는 또 한없다
비와 비 사이에 나는 또 드러나 우산 쓰는 일이 이젠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우산은 내게 속해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사람들은 내게 우산이 없다는 것과 우산을 쓰지 않은 일에 대해 늘 물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비를 맞는 일이 얼마나 인간적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축축하게 젖은 나는 늘 그렇듯이 알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눈물찌꺼기와 중력의 법칙에 순순히 따르는 추욱 처진 나는 칠순을 막 넘겼다 사실 이대로 나는 다섯 살 여자아이가 될 수 있고 이제 막 초경을 경험하는 소녀도 될 수 있고 가슴 떨림에 잠 못 이루는 스무 살 처녀도 될 수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빗속을 뚫을 때 안다
바늘 같은 빗줄기 사이사이로 말갛게 씻긴 말랑말랑함은 처녀요 에디션넘버를 갖지 않을 원본이요 차마 만져볼 엄두도 낼 수 없을 이생에서 큐브 한 조각임을
손가락
1
나는 마다카스카(Madagascar)에서 왔다
2
교태로운 손이 술병을 만지면서 손가락을 여러 개 만들기 시작했다 손가락들은 알아서 자치구역을 만들더니 흐물거리는 것들은 모두 건드려 본다 제일 길다란 손가락이 눈을 크게 뜬다 술잔이 출렁거린다 여자다 머리카락이다 슬그머니 타 내리더니 앞가슴으로 파고들어가 수작을 한다
흥건한 피가 술잔 속으로 스민다 달짝지근하다 잘도 넘어간다 순간 알렉스의 눈빛이 핑핑 돌기 시작한다 고프다 참지 못한 알렉스는 마티의 선홍빛 엉덩이를 얇게 썬다 핑그르르 입맛을 다시는 눈살을 손가락이 잘리는지도 모르게 달콤하다
얼굴을 턴다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진다 입술에서 가슴골을 타고 내려와 술잔에 스민다 둥둥 손가락이 술병 속에서 나부낀다
3
본성은 수성獸性이다 알렉스에게 마티는 본성이자 수성이자 이성이다 수많은 손가락 수많은 젖가슴이 둥둥 떠다닌다 시방 세계에서 날름거리는 혀를 쉽게 본다 맛을 보지 않고도 신선함을 알고 있는 눈들을 본다
머리는 이성과 감성을 숨겨두었다 필요에 의해 둘은 타협을 하기도 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은 이 둘의 존재가 인식되지 않은 채 잘 조합돼 드러날 것을 기대한다 머리가 지혜를 입게 된 시간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나는 마다가스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잊고 있다 어쩐지 방법을 찾지 않기로 했다
*마다카스카(Madagascar)
아프리카 동안 인도양에 위치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 20만 종에 이르는 토착 동식물의 3/4이 희귀종인 까닭에 ‘희귀생물이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불린다.
*알렉스와 마티
드림윅스사가 만든 <마다가스카>에 나오는 사자(알렉스)와 얼룩말(마티)이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사자 알렉스가 친구 마티의 엉덩이를 보며 고기를 생각한다.
김명신 : 1966년 출생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현재 ‘소통’을 화두로 사진과 그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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