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호의 「아르카디아의 광견」감상 / 서동욱, 이명현
아르카디아의 광견(狂犬) *
조연호
평광선(平光線)과 횡광선(橫光線) 아래
씨앗 망태를 들고
위작자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다.
몸을 비틀고 불구를 안고 있는 밤
긴 외랑 기둥 하나를 깨물고서야 나는 이제 헤맬 수 있게 되었다.
복서(卜書)에 얼굴을 비춰 보거나
기자(奇字)에 털을 묻히거나
사람을 낳은 신의 옷을 얻어 입는 따위의 하찮은 즐거움으로
겨울을 두드려 본다.
매 문장마다 반드시 초조해지는 강에
우린 얇은 얼굴을 띄웠다.
(그런데 사실은 그대로 되지를 않았다)
축마(畜馬)와 함께
이가 흔들릴 때마다
사탄이 내 어금니를 찌른다고 고함치기
(이게 대체 무엇에 쓸 수 있는 진심인가)
종자 더미에 불을 던지러 온 사람이야말로
씨앗 이외로는 자신을 불태울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하늘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마지막 화풍이었다.
밤의 등 근육이 흰 똥으로 이 인체를 더럽히고 있었다.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때때로 작은 편지들이 내게 돌을 굴려 보는 날에
노래가 천민의 둥지인 건
우주가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고
하나의 영혼이 둘 이상의 신체로 덮여 가는 날에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접혀 있는 발이 아코디언처럼 소리를 펼치고 있는 건
밤이 인간의 청동빛 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꺾인 나뭇가지 같은 이 하늘 밑에서
여(余)는 남의 일기 위에 부디 설명 같은 눈물을 흘려라.
―――
* 'A rabid dog of Arcadia'. 1746. Nicolas Koss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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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에 그려진 '아르카디아의 광견'은 시인이 창작해낸 위작(僞作)이다. 위작에 대해 진실처럼 이야기하는 것, 움베르토 에코가 즐겨 쓴 수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의 시가 위작에 대해 저처럼 절실히 노래하고 있으니, 이미 저 그림은 진실인 것을!
나도 시인과 나란히 그림 앞에 서본다. 그림은 우주를 그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 우주는 순 소리로만 되어있다. 렌즈가 아닌 소리로 찍은 우주의 사진! 과학자들이 발견했듯, 흐느껴 우는 공들처럼 별들은 소리를 낸다. 우주는 보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을 내려놓고 귀로, 마음으로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별에게 위안을 받는 이가 누구인가? 바로 가까이 내려온 밤하늘 아래서 별들의 소리를 흉내내며 흥얼거리는 이가 아닌가? 그렇게 인간들은 노래 안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그러니 노래는 천민의 둥지, 노래는 별들과 우리 사이에 길게 늘어진 실타래. 쿵쿵, 실을 타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우주를 건너오네.
서동욱(시인ㆍ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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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의 광견을 읽고 있었는데, 블레이크의 '태고의 나날들 : The Ancient of Days'이 머리 속을 치고 들어왔다. 이 시와 그 그림을 연결시키려는 욕망도 잠깐, 생각이 뒤섞여버렸고 곧 후회했다. 더 큰 상상력을 위해서는 이성화된 신조차도 떨쳐버려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모아가던 중이었다. 그래야 우리들 사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결국은, 인식론 문제로 환원되는 것 같다. '우주가 음사(音寫)된 세계'이기 때문에 문득 이런 생각도 해봤다. 우리가 사실은 3차원이 아닌 2차원 우주에 살고 있다면? 2차원 세상에 온통 발려져 있는 정보가 마치 홀로그램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홀로그램 우주 이론 이야기다. 그렇다면 3차원 모습의 우리는 정보가 만들어낸 허깨비라는 이야기다. 오직 정보만이 실체일 뿐, 우리는 없다.
이명현 (천문학자,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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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通中上下察天文'(成汝信, <浮査先生文集> 卷1 '東道遺跡二十七首' 十五首 중) '빈속을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찰하다.' 인간은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대한 관심을 없는 것(공중이나 허공)으로 표현해 왔다. 도달할 수 없는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도달하려 해 왔다. 그렇기에 보는 것은 곧 존재의 싹이 되고, 본 것을 적는 일은 곧 인식의 싹이 되었다. 천문(天文)은 그렇기에 천체(天體)의 인식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 밖의 것들을, 우리는 그들의 무늬를 통해 엿보고 이루려 한다. 비슷하게, 그것은 인문(人文)이 인체(人體)/사람의 인식이어야 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주는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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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 / 1969년 충남 천안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저녁의 기원』『죽음에 이르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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