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문학 참고서재

김명은의 「사이프러스의 긴 팔」단평 / 이성렬

by 솔 체 2015. 4. 28.

김명은의 「사이프러스의 긴 팔」단평 / 이성렬

 

사이프러스의 긴 팔

 

   김명은

 

 

시로코의 바람이 늪지대를 지나가

30호 캔버스 속에 서 있는 사이프러스 두 그루 무너지지 않게 서로 몸을 기대고

거대한 밀밭에는 수염이 노란 허수아비 하나

귀와 입술, 둥근 밀짚모자, 위로 붉은 빛의 윤곽이 드러나

 

바람개비 별들의 소용돌이, 흰 구름의 융기, 높이 솟은 첨탑을 피해

코끝이 둥근 달은 오른쪽으로 별들은 왼쪽으로 뭉쳐 떠다녀

단풍나무 솔방울에도 붙어있던 날개달린 씨앗들이 어디론가 날아가

태양은 그늘이 없는 곳을 투사하고 죽음까지 태워버리는 불꽃

빛의 검은 날개들 맴돌고 불꽃은

몸을 타고 흐르는 리듬, 넘어져있던 몸을 일어서게 하는

혹은 태우면서 던져버린 꽃까지,

 

시엔, 당신은 창백한 꽃, 정물화처럼 단정하게 앉아있어

덧칠한 흔적을 지우고 낮은 담장이 보이는 보랏빛 창문을 열어줄게

생각해봐, 쏟아진 별들 중에서 가장 밝은 별을 내다볼 수 있게

광장같이 큰 창을 그려줄까?

긴 머리칼을 빙빙 감아올리면 꼼짝없이 현기증 날 거야, 시엔

당신 팔에 갈대를 깎아 만든 문자들을 새겨줄게

 

색색 고운 빛 사이에서 구불거리는 언덕

바닥을 짚고 땅 위로 치솟아 있는 민들레

생레미라는 별에는 한 번 자르면 다시는 싹 틔우지 않는 나무가 있대

그게 사이프러스야 그래서 그 별의 노란 갈대들은 하늘을 보며 소리쳐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그림자가 꺼멓게 돋고

불길을 향해 까마귀 떼가 날아와 부딪치곤 해

 

벌어진 상처 같은 건 없어 구석까지, 귀퉁이까지 뻗어가는 독

한 마리 새처럼 파닥거린 당신을 향해 뻗은 나의 긴 팔이 있어

버려진 당신을 프리즘처럼 채색할 거야 놀란 당신의 경악이 지워지지 않도록

진한 암녹색 배경이 거친 캔버스 뒤쪽으로 넘어지지 않게

초승달과 나무들 사이에 불꽃처럼 살아있어

 

 

                                                        —《시와 경계》2009년 가을호

 

-----------------------------------------------------------------------------------------------------------

 

   풍경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풍경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까. 인지과학자들에 의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쌓인 눈이 우리에게는 흰 색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회색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흰 눈에서 순결을 보려는 오랜 소망 때문이겠다. 풍경은 우리의 감각기관들을 통하여 감지되기 때문에 '실제'와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실제'라는 것이 아예 없지 않은가, 철학자들은 묻는다. 감각이 이럴진대, 서정은 어떠할까. 우리는 끊임없이 바깥의 풍경에 불안, 공포, 희망, 사랑을 투영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시인은 이러한 점에서 최상의 특권층에 속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풍경에 매혹되어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경우를 알고 있다. 추수가 끝난 생레미의 밀밭에 누워 다시는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던 고흐처럼. 머리를 풀어헤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짙푸른 사이프러스와, 팡팡 터지는 별들, 노란 밀밭 위를 음산한 동작으로 날아가는 귀기 어린 까마귀들. 그러나 고흐의 그림을 이렇게 평면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올바른 감상법이 아닐 것이다. 뛰어난 시인은 그림의 모든 색과 점, 선과 면들을 떼어내어 완전히 새로 조합하는 방식으로 풍경을 창조하여, 이를테면, 사랑에 실패한 후 온밤을 헤매어 찾아든 산장에서 듣는, '그대가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을 이제 알 것만 같군, 빈센트'라고 중얼거리는 가수의 목소리를 짙은 암녹색 음영으로 각인할 것이다.

  

   시엔은 고흐에게 어떤 여인이었을까. 화가의 생애를 추적하여 알아보는 것은 밋밋한 스노비즘일 것이다. 김명은 시인은 사이프러스의 팔이라고 했다. 그것은 '한 마리 새처럼 파닥거린 당신을 향해 뻗'는 긴팔이었기 때문. 그런데, 사랑의 방식은 예사롭지 않다. 창백한 꽃인 여인을 '생레미의 별'의 밀밭으로 불러들인 시인은, 정물화처럼 단정하게 앉아있는 여인을 프리즘처럼 채색하고, 갈대를 깎아 만든 문자들을 그녀의 팔에 새긴다. 그리하여, '당신의 경악이 지워지지 않도록/진한 암녹색 배경이 거친 캔버스 뒤쪽으로 넘어지지 않게/초승달과 나무들 사이에 불꽃처럼 살아있어' 라는 절창에 이른다. 이것은 절멸을 향하는, 어쩌면 비극적인 사랑일 게다. 이 섬뜩한 사랑에 옷을 입히는 것은 독자의 몫이요 권리이겠지만, 그것이 강렬하되 짧을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게 됨은 지나친 비약일까. 김명은의 시는 '죽음까지 태워버리는 불꽃'인 사랑의 강렬한 고백이며. '한 번 자르면 다시는 싹 틔우지 않는' 사이프러스가 버려진 밀밭에서 세상을 향해 긴 손길을 뻗는 아름다운 시적 변용을 보여준다.(이성렬 편집위원)

 

                                                     —《미네르바》 2010년 봄호

 

-----------------

이성렬 / 195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를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시집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비밀요원』.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