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의 「물 속에서」감상 / 김기택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시집『우리는 매일매일』(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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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처음 깊은 물에 빠졌을 때의 공포감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혼자라는 것의 놀라운 실감. 어둠보다도 더 강하게 세상과 차단되는 느낌.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기이한 세계. 피부로 다 만져질 것 같은 죽음. 이 섬뜩한 느낌이 땅 위에서도 순간적으로 내 몸을 관통할 때가 있습니다.
홀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일의 두려움도 깊은 물속에 혼자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만 흐르는 물에 몸을 맡깁니다. “내가 모르는” 삶의 시간이 흘러와 나를 적시고 “내가 아는 일들”로 나를 채우기를, 그리하여 내가 물이 되어 부드러워지거나 따스해지고 바다처럼 깊어지기를 기다립니다. 내 몸에는 아홉 달 동안 물속에서 살았던 모태의 기억이 있으니까요.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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