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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詩로 여는 세상》신인상 당선작 _ 배정숙, 박재홍, 권은주
곰국을 끓이며 외2편
배정숙
피멍 든 뼈를 잘라내어 맑은 물에 풀어내고 거기에 불길 당겨놓는다 아직 날선 마음 뼈에 스며 뒤척이는데 육탈을 허락한 자비는 골수에 쌓인 옹이조차 녹여내는데
마음이 곰삭아 맑은 사랑 되는 법을 밤새 기다려 배우고 있네
낙지를 먹다
물 나간 중왕리 허름한 횟집 소금기 밴 햇살에 몸 단 뻘밭 훔쳐보며 낙지를 먹는다
살아남기 위해 흡판에 불꽃같은 본능을 모아보지만 두어 줄 몸글만 남기고
뻘 속의 어둠이 빛이었네 뻘 속의 은둔이 꽃밭이었네
물 위에 찍히는 마침표 흡판처럼 달라붙어 씹히는 느낌표
초경
가장 신선한 발음 아침, 누구도 범하지 않은 물안개의 풋내음, 동쪽 하늘이 비릿한 둠벙에 빠져 벌겋다
첫 달거리 달의 피 비치는 아침 늘어지게 기지개 켜는 물풀들의 분홍 살점 낭창하다
물잠자리 소금쟁이 물방개 달콤한 더듬이가 더 먼저 사춘기였네
사춘기엔 모두가 통통 튄다 수면 위로 퍼지는 웃음의 무늬를 보라
헐거워진 관절 사이 연골 차오르자 수런대는 바람의 먼 통로 말랑말랑 반란하는 햇빛들의 기억을 본다
----------------- 배정숙 : 충남 서산 출생. 신성대학교 복지행정학과 졸업, 서산 여성문학회 회원. 2010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가을을 주제로 한 랩소디 외2편
박재홍
사랑니
소리 들보 깊이 들보 깊이 동박새 밟고 가는 허공
발등에 저무는 꽃잎의 시름, 연못가 배롱나무 어깨 뒤에 숨어 바람은 제 홀로 길을 내더라.
작은 어금니 하나 뽑아 지붕에 얹고 서른 해 지나 마흔에 이르는데.
묵언默言의 울 밖
아비의 헐거운 척추 같은 바람의 결을 짚자 만신처럼 울던 시혼詩魂은 토방으로 내려서고 하나씩 안에서 밖으로 등을 보이는 슬픔, 익은 김치에 눈 맞추듯 침이 고이는 그리움의 신열 한층 높아진 하늘에 추억의 꼬리표처럼 잠자리 날고 구름조차 흰 거품으로 스러지는 묵언의 울 밖 자운영.
가을비
돌아앉은 어머니 치맛단 사이로 단풍 든 기러기 울음 흘러내리네. 성큼한 갈빛은 화살나무 시위처럼 팽팽한데 무너진 유년의 담벼락 아래 묵은 용머리기와의 빈 그림자 암수 구분 없는 은행나무 그늘 저쪽으로 낯익은 손님, 찾아오시네.
낙숫물
문둥이로 죽어 새가 되었나. 먼 바람 속 뻐꾸기 소리.
먼 둑길을 걸어와 배롱나무 발아래 꽃들의 얼굴 씻기는 갈밭 버들피리 소리.
뒷 울안에 깃든 산그늘 따라 베개 깃 적시는 성긴 바람소리.
줄넘기
무릎을 최대한 가볍게 하렴. 발뒤꿈치를 들고 앞부리로만 사뿐히 땅을 박차거나 성정대로 하면 안 돼 갈수록 깊어지는 불신의 벽을 넘어서 다람쥐처럼 공간 속이 점, 선, 면에 눈길을 모으고 기억하렴. 손아귀의 힘을 빼고 그때 귀를 기울이렴. 한 번 넘을 때마다 네 내면에서 살아온 날수만큼의 곤고한 발목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간혹 커다란 산맥을 넘는 바람 소리 같은 오늘을 보기도 하려니 성정대로 하면 안 돼. 무릎을 최대한 가볍게 하렴.
무상검
벨 차례다 일도필살이다.
푸른 머리칼 날리며 지치던 초여름 훌쩍 보내고
노랗게 들을 채우던 가시 많은 몸짓에도 바람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을 내어놓을 차례다
사랑을 내어놓을 차례다 달마가 눈꺼풀을 베어내듯이 무상검을 들어 팔 한쪽을 베어낸 혜가처럼 나의 사랑도 무언가를 내어 놓을 차례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여 익은 보리밭같이 촛불을 밝혀 도심을 메우는데
그들은 무엇을 내어놓을 것인가 무엇으로 무상검을 들어 내어놓을 것인가 스스로를 베어낼 무언가를 준비해 왔는가 물어볼 일이다 --------------------- 박재홍 : 1968년 벌교 출생. 2010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곰팡이꽃 외2편
권은주
내 손등에 꽃이 피었다 몇 가닥 핏줄이 풀뿌리처럼 뻗어 있는 작은 구릉 위
우리 생도 유통기한이 있어서
숨겨두었던 생의 모퉁이 홀로그램처럼 형체를 드러내는 저 상형의 문자 곰팡이꽃 이제 인수분해人壽分解가 시작되었다
뿌리는 게으른 목숨에 있는 것이어서 줄기는 곧은 등뼈에 있는 것이어서
흔들리고 흔들렸던 나의 지난 시간들은 민몸의 포자주머니를 흔들어 저 꽃씨를 뿌리기 위한 것
이제 저 꽃들이 하나 둘 인물 정원에 꽃밭을 이룰 것이다
프라이팬
분리수거장 아직 쓸 만한 프라이팬이 버려져 있다
다이아몬드 코팅을 했다는 홈쇼핑의 대박 아이템이기도 했었던
평생 한 프라이팬만을 고집하셨던 어머니 코팅도 없는 프라이팬으로 지지고 볶으며 길들이며 사셨다 칠이 벗겨지고 속이 타서 검게 된 프라이팬 오히려 손때가 다시 입혀져 다이아몬드 코팅보다 더 강했다는 걸 보여주셨다
요즘 프라이팬 몇 달을 넘기기가 어렵다 지지고 볶을 일도 적어서 화내고 달래는 그 숙려의 기간 길드는 시간 없이 요리부터 시작하게 되는 이미 시작하게 되는 이미 시작부터 망쳐버리는 관계 작은 스크래치에도 쉽게 상처가 나고 끈적이며 달라붙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 버려진 프라이팬 다시 무언가 하고 싶어서 빗물을 담아 지글지글 끓이고 있다
나의 노른자가 익고 있다
헐렁해지다
거울이 자꾸 옷을 본다 오래된 팬티 고무줄처럼 탄성이 거의 없는 팔뚝이 헐렁해지고 허벅지가 헐렁해지고 앉아서 오래 수다 떨던 엉덩이가 늘어졌다 아무리 끌어올려도 흘러내린다 옷의 일생이란 누군가를 품는 일었다 악착같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던 탄성은 수없이 소유하지 못할 무엇을 품으려다가 이제는 놓는 것이 편하다는 걸 알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보정 속옷으로 모양을 다잡아 보기도 하고 전문샵에서 관리를 해 보기도 하고 그러나 한번 헐렁해진 옷 전성기 적 탄성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이제 화려한 꽃무늬 반짝이를 덧입혀 놓아야 생기가 돌고 단춧구멍까지 헐렁해져서 자꾸 서운한 마음까지 드러나는데 곧 해어질 하나의 옷에 집착한 셈이다 다만 위안이 되는 건 당신에 대한 나의 상처도 헐렁해지는 것 -------------- 권은주 : 1967년 전북 익산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0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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