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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명시들

황혼(黃昏) 외 5편/이육사

by 솔 체 2019. 6. 30.

황혼(黃昏)

이육사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黃昏)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十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鐘)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쎄멘트 장판 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ㅅ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黃昏)아 내일(來日)도 또 저― 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져간 시내ㅅ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이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 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이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이 광음을

부지런히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있어

이광야 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취)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아편(鴉片)


나릿한 남만(南蠻)의 밤
번제(燔祭)의 두렛불 타오르고

옥(玉)돌보다 찬 넋이 있어
홍역(紅疫)이 발반하는 거리로 쏠려

거리엔 「노아」의 홍수(洪水) 넘쳐나고
위태한 섬 우에 빛난 별 하나

너는 고 알몸동아리 향기(香氣)를
봄바다 바람 실은 돛대처럼 오라

무지개같이 황홀(恍惚)한 삶의 광영(光榮)
죄(罪)와 곁들여도 삶직한 누리.

 

 

喬木(교목)

            이육사(李陸史)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 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 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 없는 꿈 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湖水(호수)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

 

 

이육사 1904-1944
민족시인.저항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생가터 참고>
지금은 그가 태어난 곳에 '청포도'시비가 우리를 맞고 있습니다.

1904년 음력 4월 4일은 그의 생일입니다.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詩 '절정<絶頂>'에는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진'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습니다.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무장투쟁 단체였습니다.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6.10만세사건후 1926년 북경에 갑니다.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합니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합니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 -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에 선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입니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문단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대부분은 만주와 중국 조선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통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194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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