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餘韻)
조지훈
물에서 갓나온 여인(女人)이
옷 입기 전 한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탑(塔)이여!
온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검푸른 숲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채는 부드러운 어깨 위에 출렁인다.
희디흰 얼굴이 그리워서
조용히 옆으로 다가서면
수지움에 놀란 그는
흠칫 돌아서서 먼뎃산을 본다.
재빨리 구름을 빠져나온
달이 그 얼굴을 엿보았을까
어디서 보아도 돌아선 모습일 뿐
영원(永遠)히 보이지 않는
탑(塔)이여!
바로 그때였다 그는
남갑사(藍甲紗) 한 필을 허공(虛空)에 펼쳐
그냥 온몸에 휘감은 채로
숲속을 향하여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 층
한 층
발돋움하며 나는
걸어가는 여인(女人)의 그 검푸른
머리칼 너머로
기우는 보름달을
보고 있었다.
아련한 몸매에는 바람 소리가
잔잔한 물살처럼
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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