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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명시들

피리 / 문효치

by 솔 체 2020. 4. 29.

피리

문효치



나는 대나무여요.
외로운 악사의 피리가 되기 위해
거센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수많은 칼질에도 베이지 않았어요.

푸른 하늘을 머금고 키워 온 몸뚱이는
외로움의 낫을 가는 미지의 악사,
그의 낫날에나 잘리워질 거예요.

그의 꼿꼿한 송곳으로 내 몸엔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으로 새로운 세상이 내다보여요.

그의 낫질이 다듬는 대로 이 몸이 다시 빚어지면
어느덧 나는 한 자루의 피리가 되어요.

그의 두 손이 더듬어 보듬으면
온 몸은 파르르 떨리는 성감대.

그의 입술이 와 닿으면
영혼 깊숙이 앓는 환희의 몸살.

뜨거운 입김이 몸 가득 퍼질 때
아, 나는 신음 같은 청을 돋궈 노래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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