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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by 솔 체 2014. 9. 30.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의 시집『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에서 김현은 기형도의 시세계를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으로 명명했다. 가난한 유년의 기억과 실연의 부조리한 체험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고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펼쳐 보이며,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진 채 자신 속에서 암종처럼 자라나는 죽음을 바라보는 갇힌 개별자의 비극"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그로테스크란 말 그대로 무덤 속의 시체처럼 시와 삶에서 동시에, 그것도 스물 아홉이란 나이에 암전(暗電)돼 버린 그. 그는 지금 어디에서 생사를 거듭하고 있는가.

「정거장에서의 충고」는 기형도 시인의 그런 비극적 세계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어쩌다가 집을 떠나와 정거장에서 서성거리나 이미 집으로 돌아갈 길이 이 지상에는 존재치 않고 추억은 황량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몰려와 멎고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1행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라고 쓰고 있다. 정말 희망의 길을 찾고자 해서 그렇게 다짐했던가. 하지만 시는 중반 너머 종반이 다 되도록 어떤 희망의 조짐도 표현하지 않는다. 되레 사람들은 참으로 느린 속도로 죽어갔고, 많은 나뭇잎들은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으며,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그 길을 묻던 혀는 흉기처럼 단단해진 상태다. 끝내는 지금까지 나의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쓰는 것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한마디로 모든 길들은 흘러오고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니, 이제 더 이상 불안 따위에 시달릴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게 마지막 희망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시달려온 시적 화자가 그간 구원의 많은 길을 찾아 헤매었으나 황량한 추억과 고향상실감만을 안은 채 마음의 한 정거장에 당도하여 죽음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상태를 서술한 시다. 그러기에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떨어지는 물방울은 목숨을 다한 나무에서 이탈한 수액으로 시신에서 흘러내리는 죽은 피를 닮았고, 종반부 화자가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이라고 타이르는 물방울도 기력이 다하여 움직이기를 그친 비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노트는 시의 처음부터 천천히 덮이는데, 사실 이 노트는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란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인간의 불안과 권태와 죽음을 캐고자 했고,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란 표현으로 보아 나뭇잎과 우주와 자연의 비밀을 캐려 했으며, 나아가선 삶의 참된 길을 찾고자 늘 의심을 품던 노트였으나 끝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닫힌다. 그러니 희망, 물방울, 노트, 추억, 개, 길 등은 이제 죽음의 희망을 노래하려는 시적 화자의 심리를 추적케 하는 화려한 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형도는, 위 시에서 나타난 대로 비록 죽음 쪽으로 암전이 되어 버렸지만, 80년대의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거대담론의 광장 속에서도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통하여 광장이라는 외부적 실존보다 그 속에서의 내면의 불안이나 허무, 그리고 죽음의식을 치열하게 묘파해 냈다. 그의 그런 독특한 개성은 아직도 시단에서 그 위의를 톡톡히 떨치며 많은 젊은 시학도들의 추종을 받고 있다 * [고재종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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