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문학 참고서재

옹이가 있던 자리 - 치밀한 구도의 시 /강인한

by 솔 체 2014. 10. 9.

옹이가 있던 자리

이 윤 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신문의 논조는 마음에 안 들지만 2002년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 시는 다른 신문들의 것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습니다. 나무판자에서 옹이가 빠져나간 구멍에 눈을 대고 바라보는 아이와 그 옹이 구멍에 눈을 대고 세계를 내다보는 서정적 자아, 그리고 아이와 '나'의 무심한 듯한 관계… 이런 사소한 것들을 범상치 않게 형상화한 시입니다.
작고 범상한 것들을 통찰할 줄 아는 것이 시인의 능력일 것입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 시가 금년도의 신춘문예 당선작들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제한된 시야로 바라보는 세계의 오밀조밀한 아름다움. 아이의 시선과 '나'의 시선 그리고 마지막에서는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옹이'― 결국 시인은 가슴에서 옹이가 빠져나간 뒤에야 가슴으로 환한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는 고백을 합니다. 무척 치밀한 구도라 하겠습니다.
뻥티기 장수와 땜장이, 그 곁에서 코를 훌쩍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뻥티기는 행성처럼 뻥티기 기구를 돌리고, 자루를 들고 기다리던 아이는 무료해서 옹이가 빠져나간 판자 울타리에 가만히 눈을 대고 내다봅니다. '나'도 어린 시절 그렇게 아픈(가난한)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그 옹이 구멍에 눈을 대고 바라본 것은 일상적인 '죽음'이며, 나는 지금 삶과 죽음의 경게-옹이 구멍-앞에 서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