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신 인 문 학 상

제21회 《시안》신인상 당선작 _ 권동지

by 솔 체 2014. 11. 6.

제21회 《시안》신인상 당선작 _ 권동지

허수아비 (외 4편)



마른 잎 흩날리면 챙이 큰 모자를 쓰겠습니다
신발끈 조이고 발길 옮겨오는 이는 없겠지만
산밭으로 바람은 홀연히 불어올 것입니다
잡종 새들 날아가 쓸쓸함이 흥건한 탓이겠지요
나는 옹이진 몸짓으로
홑이불 한 채 유난한 계절이 되겠습니다
눈 덮이고 허전하여 총질하고 싶어지면
가진 것이 모자라 위안은 되겠지만
헛방치고 돌아오는 길은 헛헛하게 보일 듯합니다
누군가 남루해진 옷 한 벌을 빌려갑니다
팔을 당기면 공허로움이 천지 가득합니다
어젯밤 솔바람이 옆구리 토닥이며 은근히
기다림에 대하여 귀띔하여 왔습니다
어깨 짚어 오던 날이 그랬더랬습니다
얼어붙었던 대지는 녹아 질척거릴 것이라고
텃밭 일구러 푸른 계절이 탁발하러 올 것이라고,
모처럼 남루해진 몸은 조금씩 야위어 갑니다
산짐승과 이름 없는 새들에게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질 모양입니다
산까치가 적막을 수음하고 갑니다
바람은 출렁이고
나는 공연히 설레입니다

----------------------------------------------------

산읍(山邑) 부근



산읍(山邑) 부근,
멎었던 협궤열차가 몇 번
산 허리께를 지르고 영혼처럼 사라졌다
버즘나무 숲으로
오래 전의 아이들이 돌아왔다
나의 격정은 놀랍도록 설레었다
조신하게 내가 서 있는 인근으로
산책 나선 개와 개의 주인에 대한
작은 오인이었을는지도 모르는,
그러나 나의 상상력은 지나치게 미온적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버즘나무 숲을 서성이었고
나의 대부분은 고통으로 불안했다
내 불손한 기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버즘나무에서 그윽히 걸어나오는 아이들,
나는 조우라는 우연한 일로 지우고 말았다
나의 본성은 버즘나무처럼 자라
봇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허름하지만, 간이역 귀퉁이를 조금씩
머무르고 싶어하던 날들의, 내 가난한 까닭이
버즘나무 곁을 그리워했다

----------------------------------------------------

비탈



지금도 바람이 조급하게 불어오면 바람의 길이 열려있는 비탈로 내려선다
뚝 끊어진 비탈이 사사로운 이기심을 부추기지만
거기는 어둠이 가라앉은 오두막이 있고 한 번도 배달된 적 없는
편안한 편지 한 통이 누렇게 겨울 햇살에 바래가고 있다
오두막으로 들이치는 사색은 풍문으로 들려오는 것만으로 부족하지 않지만
흔들리는 파도 소리가 진종일 바위너설에 넘치고 시달려
헤어진 사람들의 어설픈 얘기는 들출 수가 없다
미로 따라 뒤쫓다 놓쳐버린
비탈길은 오르고 싶지 않다던
시린 발자국 소리가 수만 년 전 전설처럼 들려온다
바람이 길을 연 탓이다
몇 달씩이나 바람이 내리치고 비탈의 마른 풀들이
겨울이 오기 전에 드러누워 버린 부끄러운 오르막 비탈에서
깡마른 대지의 물오른 이야기가
비로소 파랗게 움트는 소리로 들린다
온기의 아랫목이 씨앗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

곡우(穀雨) 지나



창 밖에 비가 내리려고 해 저무는데
개똥지빠귀 두엇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네
청명(淸明) 지나 입하(立夏) 그 사이 곡우(穀雨),
사내의 팔뚝에 새겨진 꽉 틀어쥔 주먹을 벗어나
우전 찻잎처럼 시린 이파리였네
나락의 툭 불거진 품이었네
햇살 쫓으러 나온 그늘에 가린 담 밑의 햇병아리였네
흑산도 부근 겨울 보내고
엉겁결에 가까이 휘저어 오는 조기떼였네
곡우(穀雨) 지나 입하(立夏) 그 사이,
부득부득 때 묻어 오는 일상
변태와 불안,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게 서성였네
흐린 날 창 밖은 어두워지는데
머뭇머뭇 이다지 허황한 일이나 저지르는 사이
산다래 자작나무 박달나무 물오르고
쥐똥나무 두엇 앉은 이름 없는 새 푸른 가지 비 맞으려 하였네
무른 가지 비 옮겨 젖으려 하는데
빈 수작이나 들여놓고 헛디디는 발자국 깊이 묻으려 드네
확연히 드러나 보이지 않네
곡우(穀雨) 지나 청명(淸明) 지나
왜, 이다지 돌아오지 않는 몸
허망한 빈곤이나 부르려 드네

------------------------------------------------------

앉은뱅이꽃



모로 누운 이의 겨드랑이에 숨어있었던 것 같다
가시광선 푸들대는 숲 그늘 아래 숨었던 것 같다

마당가 배추밭 가장자리에 놓고 길러 본 것 같다
동아줄에 매이어 가는 네 등줄기 마른 땀 흐르는
여름이 오고
검붉은 가지 꺾어 앙증맞은 이파리와 화분에 옮겨 심고
비 오기 기다리던 때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도 없고 친구도 없고
빈 집 뜰 아래 집짐승 하나 보이지 않을 때인 것 같다
나는 호젓하지도 않았고
너는 맥없이 꽃망울 터뜨리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바람이 흩뜨려 놓은 넘어진 풀들을 가지런히 세워놓고 싶고
너는 말없이 휴가 나온 푸른 날씨처럼 한가롭게 나부끼고 싶고

진종일 발길에 채여 넘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가 앞 시멘트 바닥 철기둥 아래
너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잠잠 휴식을 서두르고 있다

-----------------
권동지 / 전남 여수 출생. 연세대학교 화학과 졸업. 동원상사 대표 역임. 갈무리문학회 회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