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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문학사상 10월호 [이달의 문제작]

by 솔 체 2014. 12. 2.

문학사상 10월호 [이달의 문제작]

가깝고도 먼 / 김유중(서울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시가 내게로 왔다'라고 쓴 시인이 있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애초 의도하였던 내용을 언어로 표현해 내지 못할 때, 밤새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보아도 만족할 만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리하여 더 이상 시작(詩作)을 지속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지루한 노력의 시간들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시인이라면 누구나가 한두 번쯤 그런 절망의 끝자락에서, 그토록 자신이 바라던 한 구절의 시구가 홀연 자신을 방문하는 예상치 못한 경험의 순간들이 있을 줄 믿는다
시란 원래가 그런 것이다. 애써 손에 넣으려 한다고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처음부터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이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시적 감격의 순간은 마지막 순간까지 진정한 시에의 도달이라는 목표를 포기할 수 없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흔치 않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모든 것이 도로(徒勞)에 그칠지라도, 멈출 수 없는 내면의 열정을 지닌 이들에게는 언젠가 다가오게 되는, 아니, 다가온다고 믿고 싶은 그런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을 엿보다―강인한, 윤의섭

삶 속에서 안정감을 찾아 나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역으로 그 안정감을 깨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안정감조차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그 순간 우리는 꿈꾼다. 머나먼 어느 곳으론가, 전혀 처음 접해 보는 낯선 곳으로 무작정 떠나고 싶다고.

벚나무 꽃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꽃잎 두 장
다른 세상으로 날아간다
떨어진 수많은 꽃잎들이 맨땅에서 서로 손잡고
빙글빙글 원무를 추며 흙에 섞일 때
그렇게 시들어감에 순응하고 있을 때

물살에 실려 멀리 떠내려가기로
작정한 물고기처럼
기류를 타고 높이 솟구쳐 오르고
간질거리는 이승의 소식이 차마 그립지 않은 듯
날아올라 허공에서 맴돌며 가슴 죄며 꽃잎들은
바라보는 것일까 저 먼 피안의 기슭을

환하고 둥근 비늘
하늘의 물고기가 된 꽃잎 두 장
더 높이 더 높이 날아오른다
알 수 없는 향기와 빛이
낯선 이름으로 파닥이는 곳, 당신의 꿈 속을 향해
―강인한, 〈하늘의 물고기〉전문(《시와정신》가을호)

강인한의 위 텍스트는 그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다. 벚꽃잎 두 장이 하늘거리며 허공을 가로지르며 떠다니는 모습에서 물고기의 유영을 떠올렸던 것일 게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꽃잎의 움직임을 통해 그는 피안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은근히, 그리고 솔직하게 내보이려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쩌면 현세에 속하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이상 세계를 그려야만 하는 시인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이리라.
시인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다. 갇힌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피안의 세계를 갈구하여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시인은 운명적으로 저주받은 존재이다. 지상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하강의 슬픈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언제까지나 천상으로, 천상으로만 상승하려 든다. 그와 같은 그의 꿈은 불가능하지만, 불가능함으로서만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끝내 그런 자신의 헛된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기는커녕 그 꿈에 다가서기 위해 불철주야 맹렬히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다.
그런 저주받은 운명의 세계 속에 갇혀 지낸다는 것은 시인인 그에겐 차라리 행복이리라. 그런 점에서 위 텍스트는 낭만적 이로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세계를 향하는 시인의 눈길은 지극히 부드럽고 따사롭다. 마치 그런 운명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이처럼. 그러나 그런 부드러움 속에는 이미 이상 세계를 향하는 시인 특유의 열망이 감추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먹이를 찾아 새벽에 떠난 물새는 어디 가서 저렇게 늙어온 것일까
그새 마을은 통째로 수몰되어 호수 밑에 잠겨 있을 뿐이다

어스름 저녁
때 되면 밥 먹으러 들어와야지 부르는 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언뜻 사람 그림자가 물밑에서 어른거린다

나는 묻는다
살려면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는 들쳐내지 않을 기억의 밑바닥에
모두 묻히지 않는가

그득한 물기와 뿜어 나오는 목향에 잠긴 숲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

밥 먹으러 기어들어가야겠다
―윤의섭, 〈수장(水葬)〉전문(《시인시각》가을호)

이에 비해 볼 때 윤의섭의 경우는 또 어떤가. 그에게 있어 시작이란 자아와 세계의 비밀을 캐내기 위한 모색이자 시도라고 규정해도 좋을 듯하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만이 전부는 아니다. 내가 모르는 나, 내가 모르는 세계의 존재를 더듬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이러한 목표에 시작이라는 방식을 통해 접근해 들어가려 시도한다.
그는 이러한 존재의 본질이 스스로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그 기억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발견해 낼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걸 찾아 헤매고 돌아다니는 자가 있다. 위 텍스트에 나오는 물새처럼 평생 걸쳐 호수 밑바닥에 잠겨 수몰된 마을의 흔적을 찾아 물밑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자, 그가 바로 시인이다. 요컨대 윤의섭이 바라보는 시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의 시가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눈길이 향하는 그곳은 우리에게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알려주는 바가 없다. 시인 역시 그 곳이 생소하기 매한가지일 것이다. 다만 시인은 그 세계의 초입에 서서 우리를 향해 그 미지의 세계의 존재를 손짓하며 일러주고 있을 따름이다.

(이하 심창만의 '침묵', 허혜정의 '무인탐색선', 강정이의 '얼음조각', 석정호의 '상어고기', 송재학의 '늪의 內簡體를 얻다' 등의 시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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