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자아와 열린 세계, '지퍼의 구조' / 오정국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8년 9-10월호
지퍼의 구조
김지녀
뜨거운 계단들이 열리고 있다
나의 목까지 밀고 들어오는 진흙처럼
계단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나를 잡아당겨 놓았다
나는 한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생각하는 자세로 오해받기 적당하다
그러나 지금 나에겐 어떠한 생각도 자세도 없다
움직일수록 계단들은 더 깊게 열린다
이것은 극단에 가깝지만
위에서 아래로
나를 힘껏 잡아당긴 것은 Y의 말대로, 나이다
그러고 보니 계단을 만들어놓은 것 또한 나이다
이쪽과 저쪽이 잘 맞물려 서 있는 자세에 대하여
틀어진 이를 가지런히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힘껏 당겨도 닫히지 않는 계단 앞에서
나는 기울어져 조용히 멈춰 있다
―《현대문학》2008년 8월호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지 특허를 냈는지 모르지만 지퍼는 내 몸을 숨겨주고 보호해주는 아주 편리한 '자물쇠'이다. 동시에 '열쇠'이다. 단추는 좀 헐렁하다. 그러나 지퍼는 개폐가 용이하고 빈틈없이 여닫힌다. 시인은 이런 지퍼의 속성을 빌어 '나'와 '세상', 그러니까 '숨어 있는 자아'와 '열려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퍼는 우리 몸의 옷을 따라 직선으로 여닫힌다. 나선형이 있긴 하지만, 계단도 대략 직선으로 뻗어 오른다. 시인은 지퍼의 촘촘한 톱니를 계단으로 비유하면서, 계단에 선 화자의 자세를 주목하고 있다. 세상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언술이다. 여기서의 계단은 세상과의 통로이자 창(窓)이다. '나'는 그 통로에 서서 좌우의 균형을 유지하며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세상을 만나려 하지만, 몸이 자꾸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내'가 몸을 움직일수록 세상과의 통로는 뜨겁게 다가오고 깊게 열린다. 그럴 것이다. '나'는 지퍼를 힘껏 잡아당겨 '나'를 열어젖히고, 세상과의 소통을 열망한다. 그런데 그 통로는 이미 '내'가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인식이 놀랍다. 내가 꽃을 바라보기 전에 꽃은 이미 피어 있었고, 내 시선 또한 그 꽃을 바라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니! 그랬던 것일까, 애당초 우리는 이 세상과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던 카오스였던 것인데, 그 어디서 분별을 익혀 저마다의 타자로 존재하게 된 것일까.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되고, 그것들이 '잘 물러서 있'어야 한단 말인가. 언제부터 우리는 이런 상태를 '편견 없는 균형'이라고 말하게 된 것일까. 허지만 이 지상의 모든 관계는 지퍼나 계단처럼 틈이 잘 맞지 않게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틀어진 이를 가지런히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것은 역설일 것이다.
―오정국 (시인, 한서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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