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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황금동전이 쌓이는 의자 / 한명희

by 솔 체 2015. 1. 14.

황금동전이 쌓이는 의자

한명희



괴테가 앉았던 이 의자 섹스피어가 앉았던 이 의자를 내어드리지요

카프카가 앉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앉았던 이 의자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이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눈 좋은 목수가 동굴에서 해저에서 꿈속에서 나무를 골라냈습니다 오르페우스의 후예들이 의자에 돋을새김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자식들이 의자를 지켰습니다

당신들이 몰려오자 이 의자가 황금빛으로 물드는군요

좋습니다 내어드리지요 의자 위에 황금동전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달려오자 영문 모르는 사람들조차 뛰기 시작합니다

의자가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를 복제합니다 의자가 늘어납니다 황금동전이 그득그득 쌓입니다

좋습니다 앉으시지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이 의자를 보들레르가 앉았고 두보도 앉았고 백석도 앉았던 이 의자를 당신들께 내어드리겠습니다

―《시작》2008년 여름호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근원적인 스펙트럼이다. 우리의 삶에서 욕망이 다양한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층위가 그만큼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도 일종의 욕망의 산물이다. 시인은 욕망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눈의 불완전성과 불순성을 끊임없이 반성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세계를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욕망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까지 마음의 눈으로 포착해 낸다.
그런데 시인이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도 일종의 욕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인의 욕망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게 되는 물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욕망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시인의 이러한 욕망에는 시적 윤리와 미적 자유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시적 윤리는 보편적 의미의 윤리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보편적 윤리가 인간의 전반적인 삶을 규율하고 규정하는 사회적 규범이라면 시적 윤리는 시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윤리를 가리킨다. 시적 윤리는 때때로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을 뛰어넘는 곳에 존재하기도 하고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시 스스로를 무화시키는 곳에 존재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시적 윤리는 선과 악의 차원이나 문학적 장르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적 윤리는 도덕적 차원보다는 오히려 미적 차원에 가깝기 때문에 시의 내부에는 본질적으로 미적 자유를 향한 시인의 욕망이 숨어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시인은 시적 윤리와 미적 자유를 위해서 끊임없이 꿈꾸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때때로 백석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지용처럼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나 서리까마귀 우짖는 소리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인의 미적 욕망은 인간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물신주의나 세속적 욕망에 의해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기도 한다.

이 시는 언뜻 보면 조병화의 「의자」에 비견되는 발성법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물신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 문학의 현주소를 ‘의자’라는 상징적 대상물을 통해서 반성적으로 되짚어내려는 시인의 의도가 엿보인다. 본래 문학이라는 이름의 ‘의자’는 괴테와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유수한 시인 소설가들이 앉았던 순수한 문학적 의자였었는데, 물신주의자들인 ‘당신들’이 몰려오자 그 의자는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시인은 이러한 흐름이 단순히 일회적인 흐름이 아님을 깨닫고 순순히 의자를 내어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인이 내어놓은 의자는 그 위에 황금동전이 쌓이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복제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좋습니다 앉으시지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이 의자를” “당신들께 내어드리겠습니다”고 선뜻 양보한다. 이러한 발상은 조병화가 ‘의자’를 후세대에 물려주려는 것과 같은 순리적 의지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황금빛 물신주의에 물들어가는 의자, 즉 ‘문학’의 순수성 상실을 비판하는 반어적 포즈가 내재되어 있다.
시인이 물신주의에 내준 ‘의자’가 복제된다는 것은 문학의 디지털화를 통한 무한복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은 과거처럼 문학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의자’에 그치지 않고 무한 인세 소득을 통해서 소설가나 시인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한 달에 인세 소득이 수 천만 원인 소설가나 시인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이 시가 과장된 포즈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플라톤이 문학을 본질에서 멀어진 모방의 개념으로 파악해서 시인 추방론을 외치던 시대와는 격세지감이 없지 않지만, 문학을 단지 경제 개념으로 파악하기 시작하면 문학의 순수성은 상실된다. 대중성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문학이 문학성을 포기하고 상업성에 더 큰 가치관을 두게 되는 현실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요즘 들어 새삼스럽게 백석이나 윤동주가 그리워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 박남희, (현대시, 2008년 7월호「욕망의 시적 윤리와 미적 자유」에서)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 조병화 「의자」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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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이 남장 여자로 나타났다고 한다.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그러나 왜곡이면 어떤가. 왜곡과 상상력은 인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상상력은 ‘예술’의 주요 항목이 아닌가. 문제는 돈에 있다. 돈을 벌어다 주는 상상력에 있다. ‘이 세상의 가장 안쪽을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라는 ‘의문’은 괴테의 드라마 ‘파우스트’에서 던져졌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의 시대, 팩션의 시대에 답은 간단하다. “황금동전”이다. 모두들 황금동전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황금동전을 벌어들이는 상상력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황금동전이 쌓이는 의자’는 이 현실에 대한 탁월한 알레고리!

―박찬일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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