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산림문화작품 공모전 대상작
젖은 책을 읽다 / 박종인
별장 앞에 두꺼운 책 한권. 파란 글씨들이 움직인다.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글자들 저마다 수군거린다 키 큰 나무가 무엇인가 찾아 두리번거린다
손에 침을 묻힌 빗방울 쪽수를 확인한다 이리저리 글씨를 흔들어 본다 마른 글씨들을 찾고 있다 조심해 아차하면 책장이 찢기니까 맨 앞줄에선 글씨가 소리친다 누군가 페이지를 북 찢어간다 그 바람에 쪽수가 달라지고 숨겨둔 향기가 한 움큼 날아간다
젖은 머리가 싫어요 ‘울음’이라는 글씨가 도리질을 해요 난 목이 말라요 ‘갈증’이란 글자가 마른 침을 삼켰어요 살살 만져요 ‘겁쟁이’라는 글자가 겁을 먹고 파랗게 질렸어요 건드리지 마세요 ‘가시’라는 글씨가 가시를 세웠어요 그 많은 소원을 다 들어줄 수 없나 봐요 맨 뒷장 키 큰 나무가 벌컥 물을 들이켜고 옷이 다 젖었어요 꺾인 고개가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아, 비가 그쳤어요 책 한권이 흠뻑 젖고 퉁퉁 불은 글자들이 떠 내려와요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책
나는 저 숲이라는 책을 말려서 다시 읽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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