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 <현대시>,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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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아파니시스(aphanisis)를 위하여
박대현
시인에게 자의식은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병소이다. 시적 자의식의 출현 시기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보면 우문愚問일 수도 있는 것이, 시의 출발은 인간의 자의식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인간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자의식이야말로 예술이 탄생하게 되는 정신사적 기원이 아닌가 말이다. 영원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죽음을 의식하는 데서 시작되기 마련이므로, 이미지(예술)의 탄생은 소멸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에 맞닿은 자의식은 본질적으로 자기분석적이다. 그리고 라깡이 말했듯이, 자기분석의 종결은 주체의 소멸(aphanisis)이다. 라깡에 있어서 소멸은 단순한 욕망의 소멸이 아니라,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주체에 빗금을 침으로써 주체란 근원적으로 균열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기도 했던 라깡이 자기분석의 최종단계로서 주체의 소멸을 거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달리 생각하면, 라깡의 작업은 시적 작업의 궁극과도 닿아 있는 셈이다. 시적 자의식은 결국 주체의 죽음을 불러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깡이 말하는 주체의 소멸은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상징계의 붕괴를 의미함을 애써 환기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소멸의식은 구체적 이미지(육체의 죽음)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라깡이 말하는 주체의 소멸과는 다른 차원을 지니는 것이다. 하여 죽음(소멸)을 향한 욕동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 육체를 끊임없이 해부할 것을 강요한다. 육체는 시인의 언어를 통해 해부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체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은 현대 시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함기석의 시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역시 육체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이 뚜렷하다. 육체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그의 시는 육체를 매개로 하여 주체의 소멸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해부는 곧 주체가 소멸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주체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욕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함기석의 시에서 새로운 점이 있다면, 육체의 소멸이 곧 주체의 소멸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주체의 소멸은 곧 실재계로의 진입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는 주체의 소멸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초월일지라도 뚜렷한 출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육체를 매개로 한 초월의 감성은 육체와 주체를 지움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정신적 풍경인 것이다.
초월의 감성이야 그다지 새로운 시적 주제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에서 초월에 이르는 시적 형상화의 방법이 문제다. 함기석은 육체를 악기에 비유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동통을 무거운 음향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시각적 이미지로 변주해낸다. 그것과 대비되는 초월의 적막 역시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악기화한 육체의 소멸은 청각과 시각을 통해 매우 감각적으로 형상되고 있다. 죽음에서 초월에 이르는 육체(악기)의 연주가 이 시의 주제인 셈인데,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감각적 이미지로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는 풍경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여자의 흉부에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이 심장을 지나고 있다. 핏줄은 물론 기타줄이다. 늙은 몸을 조율하는 행위는 육체에 대한 자의식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것도 ‘팽팽한’ 핏줄들이고 보면, 육체는 자의식의 긴장으로 인해 곧 터질 것만 같다. 여자는 팽팽한 핏줄의 육체를 ‘조율’하며 죽어갈 순간을 가늠한다. 그것은 육체의 소리를 듣는 동시에, 죽음의 깊은 음音을 길어 올리는 일이다.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소리를 우리는 듣지 못한다. 악사 여인은 늙은 몸을 조율하며, 그윽한 육체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첫 번째 줄을 끊는 순간 “핏물이 저음으로 흐르”기 시작하며, 기억과 망각은 동맥과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으로 흐른다.” 두 번째 줄을 끊는 순간,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돈다. 세 번째 줄, 네 번째 줄, 다섯 번째 줄에 이어 마지막 줄을 끊을 때, 여자의 몸은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이와 같은 비유는 주체의 소멸을 감각적으로 조형하는 데 성공한다. 육체가 악기라니, 그것도 기타줄이 심장을 지나는 핏줄이라니! 함기석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육체의 미세한 떨림을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핏)줄을 끊는 순간, 육체 사이로 비치는 허공의 이미지이다. (핏)줄이 끊어질 때마다, 새들이 날아오르거나(2연), 구름이 흘러나온다.(4연) 해체되어가는 육체는 ‘무無’로 환원되어가며, 죽음에 대한 자의식은 시간의식을 필연적인 한 쌍으로 끌고 나온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 이 얼굴은 시인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다. 이미 허공이 되어버린 악사 여인은 새로운 줄을 퉁기는 것이다. 여섯 줄을 다 끊고 난 뒤 발견하는 “0번 줄”! 거기서는 침묵이 흘러나온다. 이 침묵은 우리가 한 번도 들은 바 없던, 들을 수도 없는 타자의 소리다. 0번 줄은 침묵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가”는 “0시의 바깥세계”!
시인은 주체 너머 황홀한 적막의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꿈은 미적 형식 속에서나 가능할 뿐, 악사 시인은 여전히 “시간이 타버린” 몸을 조율할 뿐이다. 그 소리는 지금도 내 몸 속에서 울린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붉은 현絃! 그렇다면, 내 몸은 초월을 꿈꾸는가. 꿈꿀 수 있는가. 시의 적막(초월) 끝에 남는 것은 비루한 현실의 육체일 뿐이다. 초월과는 무관한 이 남루한 육체야말로 우리 현실이 아닌가 말이다. 초월은 언제나 그렇지만, 비참한 현실의 다른 얼굴이다. 그러니 악사 여인에게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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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 | 문학평론가. 2005년 〈부산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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