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바람
김향미
컵이 쓰러진다 쏟아진 블랙커피가 책상 위로 미끄러진다 낡은 그림책이 젖는다 잉크가 번진다 산 중턱 구름이 젖는다 마른 억새의 휘어진 줄기가 젖는다 바위를 굴리며 산을 오르는 남자의 근육이 젖는다 허공에 붙박인 새의 정지된 날개
희한한 일이야 룰루, 휴지를 찾아 투스텝 밟으며 뛴다 이 가벼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날개를 퍼덕인다 두둥실 떠오른 몸이 절벽 사이를 난다 어딨지 어딨어. 가속도 붙이며 아래로 날다가 다시 차고 오른다 재생되지 않는 멜로디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소(沼)에 갇힌 물거품이 제자리 돌기를 한다 몇 바퀴 돌던 물방울 떠내려간다 동동, 스러진다 휴지는 하얗게 흘러내리는 폭포수, 번진 활자는 일제히 폭포 속으로 빨려든다 맑은 갈색 소동은 얽히지 않는 한 편 날개가 된다 날기를 멈추지 않는 새
닫힌 창문의 격자무늬 틀 위에 먼지 날리는 소리 들린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행운목 이파리가 흔들린다 걷힌 커튼 아래에 조각모음 중인 사선의 빛줄기를 엿본다 맞춰진 퍼즐의 귀퉁이를 커튼 그림자가 갉아먹고 있다, 랄라
우리의 호프
아마 육지를 꿈꾸면서 시작되었을 거야
몸에 찍힌 달무늬가 과녁이 될 줄이야, 내려오는 그물은 더욱 촘촘하게 짜여 있었어 압박해오는 물의 살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지 어둠이 지느러미의 가시를 자라나게 해 심해의 달고기, 바닥을 견디는 힘은 납작한 달무늬에서 나오는 걸까 몸이 납작한 것은 선천성 모습이 아닐지 몰라
도수 높은 빛줄기에 취하고 싶었어 어떻게 한 잔 안 하고 넘길 수 있겠어 구멍 난 기구를 타고 협곡을 건널 수는 없는 일이지 지금 딱, 한 잔이 부족해 수맥을 더듬는 펌프질에 마중물 같은, 멈춰버린 엔진에 시동 걸어줄 힘이 부족해 쓰디쓴 오늘을 호프에 희석하여 남김없이 마셔버리는 거야 내일은 검고 깊은 동굴 하나 떠오르겠지
어느새 호프가 바닥났잖아 육지 냄새가 퍼지고 있어 싱싱한 취기에 지느러미가 길어졌어 늘어진 지느러미에 힘이 솟고 있어 시야가 넓어지고 있어 점점 가벼워지고 있어 이제, 물속으로 가지 뻗는 저 빌딩 아래 달을 만나러 가야 해 한번, 지느러미 퍼덕이는 연습부터 해볼까 일단, 호프 하나 추가요
바다낚시
사위가 어두워지면 불 밝히는 바다, 사각의 화면 앞을
생쥐 한 마리 바쁘게 움직인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미끼
제 향기 닮은 떡밥을 찾아 클릭클릭
남의 창고를 뒤지기 시작하는 소리 그치지 않는다
신중하게 골라 훔쳐 온 미끼를 안고
그는 밤바다로 나아간다.
고요한 물결 위에 미끼를 내린다 가만히 떠서 깜빡이는 찌를 팽팽한 시선으로 노려본다 잘 버무려진 미끼를 달고 물속으로 던져진 미늘, 가시를 감싼 향기가 퍼지면 물 속 깊은 곳을 유영하는 물고기들 몇 마리쯤 그 향기에 끌려 올라올 것이다. 벌써 툭툭 건드리며 지나치기도 하고 한 입 베어 먹기도 한다.
베어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떡밥, 아래쪽에 제 꼬리를 남기고 유유히 멀어지는 익명의 유영, 아무렇게나 끊어놓은 꼬리에 찔려 그는 피를 흘린 적이 있다. 입질이 늘어날수록 더욱 부풀려진 떡밥을 들여다보며,
한 마리 물고기 되기로 한다
만발한 향기에 끌려 사각의 바다로 뛰어든 그의
살림망, 비어있는 그물 사이로 흐르는 물결에
핏발 선 눈. 헛배가 부르고 때늦은 멀미를 한다
전원이 꺼지고 사각의 바다 속으로 잠겨가는 파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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