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직소폭포」평설 / 전동진
직소폭포
안도현
저 속수무책, 속수무책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필시 뒤에서 물줄기를 훈련시키는 누군가의 손이 있지 않고서야 벼랑을 저렇게 뛰어내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오 물방울들의 연병장이 있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소
저 강성해진 물줄기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고 싶은 게 어찌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소 채찍을 허공으로 치켜드는 순간, 채찍 끝에 닿은 하늘이 쩍 갈라지며 적어도 구천 마리의 말이 푸른 비명을 내지르며 폭포 아래로 몰려올 것 같소
그 중 제일 앞선 한 마리 말의 등에 올라타면 팔천구백구십구 마리 말의 갈기가 곤두서고, 허벅지에 핏줄이 불거지고, 엉덩이 근육이 꿈틀거리고, 급기야 앞발을 쳐들고 뒷발을 박차며 말들은 상승할 것이오 나는 그들을 몰고 내변산 골짜기를 폭우처럼 자욱하게 빠져나가는 중이오
삶은 그리하여 기나긴 비명이 되는 것이오 저물 무렵 말발굽소리가 서해에 닿을 것이니 나는 비명을 한 올 한 올 풀어 늘어뜨린 뒤에 뜨거운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주름을 지우고 수평선 위에 걸쳐 놓을 것이오 그때 천지간에 북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기를 해도 좋소 나는 기꺼이 하늘에 걸어둔 하현달을 걸겠소
―『시안』,봄호
한 마디의 말, 팔만구천구백구십구 마리의 말
전동진
선적(linear)시간에서 벗어나 무시간성 속에서 자신을 탐색하는 것은 그 지향하는 바에 따라 ‘초월론적 시선’과 ‘실존론적 시선’으로 나눌 수 있다. 초월론적 관점에서는 자신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부정하고 ‘신적인 것’을 닮아가는 것이 최선의 자기를 만드는 것이다. 실존론적 관점은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괄호에 묶고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본래적 자기를 탐색한다. 시선은 당연히 아래로 향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관점은 자신에 대한 애정과 타자에 대한 의도적 배제라는 양날의 칼을 가졌다. 타자와 습합되어 있다면 타자를 베기 위해 자기 마저도 베어버리는 것이 실존적 관점이 견지하는 냉철함이라고 하겠다.
이 둘의 관점에도 도무지 동의할 수 없더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의 중심 주제는 ‘자기’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초월론적으로 상승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제3의 시선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내가 되어보는 것, 이것은 자신에 대한 최대의 배려이다. 미셀 푸코는 자신을 굽어 볼 수 있는 시선, 즉 신神의 자리에까지 솟구쳐 올라 신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마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기를 주문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한 공간 위로 직접 날아오를 수 없다. 글쓰기, 특히 시의 위용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시를 통해 자신을 굽어보는 시선을 갖게 될 때, 이 시선은 눈이 아니라 손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 과도하게 의미의 짐을 지우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시의 1연에서 ‘물줄기를 훈련시키는’ 것이 ‘누군가의 손’이라는 것에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세기와 마찬가지 지금 역시 기술의 시대이다. 기술技術이어도 좋고 기술記述이어도 상관없다. 지금을 주름잡고 있는 기술은 아트art나 스킬skill이 아니라 크래프트craft인 것 같다. 아트art는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자발적으로 한 발 앞서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스킬은 이제 기계의 몫이 되었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스킬, 대중을 열광시키는 아트가 곧 크래프트일 것이다. 완성된 크래프트의 손기술을 지닌 이들이 대중들로부터 받는 것이 ‘신神’의 칭호다. 젊은 감성들이 스타크래프트로 대변되는 프로게이머에 열광하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다시 시로 돌아가 서정주체의 변모 과정을 따라가 보자. 물줄기를 훈련시키는 손은 틀림없이 신의 손이거나 신의 경지에 오른 자의 손이다. 화자는 한술 더 떠서 ‘강성해진 물줄기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고 싶’어한다. 이 채찍을 휘둘러 ‘하늘’을 ‘쩍 갈라’ ‘구천 마리의 말’을 폭포 아래로 불러보고 싶은 것이 화자의 꿈이다. 여기까지 화자는 ‘직소폭포’ 앞에서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3연으로 가면 현실은 지워지고 어느새 상상이 현존재의 거처가 되어 있다. 실로 가공할 만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이 비약을 감당하지 못하면 시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그만 멈출 수밖에 없다.
기존에 읽은 안도현 시인의 시를 대하듯이 하다가는 ‘속수무책束手無策’ 당하기 십상이다. 시인은 어느새 ‘누군가의 손’을 넘어서서 ‘제일 앞선 한 마리의 말의 등에 올라타’ 있다. 독자 역시 무슨 ‘손’을 써서라도 스스로 변화시켜서 나머지 말들 중 하나에 올라타야 한다. 그새 또 화자는 ‘그들을 몰고 내변산 골짜기를 폭우처럼 자욱하게 빠져나가는 중이’다.
현실의 화자가 상상으로 비약해 올라가서 구천 마리의 말을 부린 후 도달한 곳은 가히 신神의 자리라고 할 만하다. 3연은 인간의 말이기보다는 신의 말에 가깝다.
삶은 그리하여 기나긴 비명이 되는 것이오 저물 무렵 말발굽소리가 서
해에 닿을 것이니 나는 비명을 한 올 한 올 풀어 늘어뜨린 뒤에 뜨거운 노
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주름을 지우고 수평선 위에 걸쳐 놓을 것이오 그
때 천지간에 북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기를 해도 좋소 나는 기
꺼이 하늘에 걸어둔 하현달을 걸겠소
화자는 삶을 구조화된 언어가 아니라 ‘비명’이라고 단언한다. 비명은 어린아이의 언어거나 신의 언어에 가깝다. 이 비명이 구겨지면 곡 상징의 언어가 될 터이다. 화자는 구겨진 삶(비명)을 ‘한 올 한 올 늘어뜨린 뒤에’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수평선 위에 걸쳐 놓을 것이’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화자의 비약을 마주한 우리는 신의 경지까지 오른 화자의 손놀림으로 주름이 펴져 수평선에 걸린 비명을 또 한 올 한 올 풀어다가 주름을 잡으며 살아가면 된다.
여기서 모든 ‘나’는 두 극단에 동시에 자리 잡게 된다. 하나의 ‘나’는 1연의 화자, 곧 현실의 나가 될 것이니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주름잡으며 사는 ‘나’일 것이다. 그리고 도 다른 하나의 극에서는 4연의 ‘나’가 자리한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주름 잡힌 나의 삶을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삶을 펴는 신적인 ‘나’이다. 이 두 ‘나’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우리는 다채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천지간에 북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기를’ 하는 당사자 역시 ‘현실의 나’와 ‘신적 시선을 갖는 나’일 것이다. 북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 거의 확실한 천지간은 ‘나’의 바깥이 아니라 ‘나와 나 사이’ 곧 ‘나’의 안쪽이 될 것이다. 북소리가 울리든지 안 울리든지 알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다. 결국 승자는 내가 될 것이니 우리는 두고 두고 ‘하현달’을 보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 하현달은 지난달의 하현달과는 달리 ‘화자의 것’ 이 된 하현달일 터이다. 물론 그 지난달의 달 역시 어떤 내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기에 이긴 화자가 이미 오래 전에 ‘걸어둔’달이지만 말이다.
화자와 더불어 수직상승을 경험한 독자라면 시인에게 감사의 말 한 ‘마디’, 아니 한 ‘마리’보내 주어도 좋겠다. 그래서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경향각지에서 모인 말들을 모두 합해 팔만구천구백구십구 마리의 말을, 시인이 ‘ 한 마디의 말’로 부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보낸 한 마리 말이 활짝 펴진 ‘비명의 시’를 싣고 되돌아 올 때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현대시》200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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