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관찰법 / 김기택
1
나는 제목을 정해놓고, 또는 쓰려는 의도를 미리 염두에 두고 시를 쓰지 않는다. 시를 쓰기 전에는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 써놓고 나야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었구나 하고 겨우 눈치 챈다. 때로는 써놓고도 내 안에 있는 것을 잘 모를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찬찬히 읽어 보거나 누군가가 힌트를 줘야 뒤늦게 발견한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쓴 두 권의 시집은 나 자신의 관찰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속에는 유인원 이전부터 존재했던 조상들의 오랜 삶과 습관과 육체와 본능이 살아 있다. 그것들은 누대에 걸쳐 삶을 위협해 온 온갖 환경과 폭력과의 싸움 속에서 끝내 견디어 살아남은 것들이다. 퇴화될 것은 퇴화되고, 더 커질 것은 커지고 강해질 것은 강해지고, 구부러지거나 기형화될 것은 또 그렇게 된 채로 고착되어 오늘 현재 나의 모습이 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보이지는 않지만 내 육체나 습관이나 마음속에는 무수한 상처의 흔적들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내 성격 속에, 버릇 속에, 말 속에, 행동 속에 숨어 있다가 은연중에 또는 느닷없이 튀어 나온다. 말하자면 나는 박물관에 전시된 그 어느 유물들 못지않게 오래된 살아있는 유물인 셈이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나를 관찰하는 일은 곧 내 육체를 관찰하는 일일뿐 아니라 내 선조들의 육체를 관찰하는 일이고, 그들의 역사를 관찰하는 일이고, 그 생명체 속에 기생하면서 아직도 힘을 과시하고 있는 살아있는 폭력을 관찰하는 일이고, 그 폭력을 견디다가 변질되어 왔거나 기형화되어 온 생명을 관찰하는 일이고, 그것들 속에 녹아 있는 역사와 시간을 관찰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은 자연히 몸이나 말, 행동 따위의 생김새에 관심을 갖는다. 그 생김새는 사람들의 얼굴이 제각기 다르듯이 천태만상이다. 그리고 그 생김새에는 그 모양에 알맞은 폭력의 흔적과 상처가 배어 있다. 어쩌면 그 폭력의 흔적과 상처가 그러한 생김새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내 글은 그 관찰을 통하여 몸이나 말, 행동, 습관 등에 숨겨진 폭력과 상처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현실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도, 적어도 나에게는, 훨씬 더 생생하고 리얼하다. 때로 왜 현실과 직접 부딪치지 않고 피하느냐 또는 우회하느냐는 질책 같은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내 관찰법과 시 쓰기의 방법은 내 생김새가 선택한 것이다.
2
때로는 눈을 약간 돌려 나를 관찰하던 그 눈으로 동물이나 사물을 보기도 한다. 이것도 나에 대한 관찰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닭은 왜 새이면서 날지 않고 두 다리로 걷는가? 날개 대신 다리를 발달시킨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진화과정 속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달리 말하면 퇴화된 날개와 발달한 다리는 폭력에 의해 기형적으로 변형된 상처이다.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폭력의 유물인가? 그 폭력은 닭이 살아 있는 한 끝까지 닭과 함께 살면서 닭을 괴롭히리라.
또 예를 들면 보호색을 가진 동물이나 곤충이 있다. 그 보호색은 폭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잡혀 먹히지 않으려는 불안과 공포와 정신력이 피부색을 바꾸어 놓았다면 참으로 대단한 힘이 아닐 수 없다. 폭력을 드러내 주는 얼마나 아름다운 상처인가?
앞으로 모든 동물에게는 고기냐 장식물이냐 멸종이냐의 선택이 남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애완동물을 생각해 본다. 애완동물은 야성을 장식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장식물은 다른 장식물처럼 단순히 예쁘거나 귀여운 것이 아니라 야수성이 잠재되어 있는 예쁨과 귀여움을 갖고 있다. 거세된 야수성은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주인에게 예쁨과 귀여움으로 장식된 야수성을 자극시켜 더 큰 장식효과를 준다. 분재처럼 예쁨과 귀여움도 폭력의 상처인 것이다.
동물의 경우는 나 자신보다도 그 폭력의 경우가 더 다양하고 극명하다. 나는 나를 관찰하듯이, 마치 그들이 나인 것처럼 그것들을 관찰한다. 혐오하고, 증오하고, <호랑이>의 경우처럼 그 원시적인 화려한 본능을 회복시키려 애써보기도 한다.
3
시집을 다시 읽어 보니 내 시에는 폭력을 표현하는 단어와 그것에 반대되는 단어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예가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폭력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단어는 직선이나 소음, 또는 딱딱하거나 뻣뻣하거나 무겁거나 튼튼하다는 단어를 쓰고 있고, 그 반대되는 단어들은 곡선이나 고요, 또는 부드럽거나 나약하거나 섬세하거나 둥글다는 단어를 쓰고 있다. 시 몇 편을 추려 보았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던 것이다
<멸치>중에서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멸치>중에서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틈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버린다
<소2>중에서
아침, 빛이 잠자고 있던 힘들을 깨운다. 힘과 힘들은 깨자마자 서로 밀고 부딪히며 거대한 소음을 만들고 그 소음의 수많은 구멍과 흡반 속으로 먼지들은 무차별하게 빨려 들어간다. 먼지들은 가늘고 긴 선율에서 뽑혀나와 경적이 되고 매연이 되고 격렬한 진동이 되어 바람을 일으키고 창문을 흔들고 흙가루를 날리고 공기의 틈을 불순물로 채워버린다.
<먼지의 음악>중에서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틈>중에서
가늘고 맑은 소리가 문득
들려왔다 놀라웠다
연약한 소리들이 공기의 바위를 뚫고
용케 나의 귀까지 온 것이다
맑음의 힘으로 단단한 벽을 뚫고
내게 찾아온 그 소리는
<구로공단역의 병아리들>중에서
4
나는 동물이나 진화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거나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폭력에 대해서도 특별한 체험이나 노이로제를 갖고 있지 않다. 나와 내 주변에 대하여, 또는 그것들의 육체와 말과 본능에 대하여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폭력의 흔적에 대하여 관찰한다고 썼지만, 사실 내 생활의 대부분은 이러한 것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밥 먹고, 잠자고, 출퇴근하고, 잡생각하고, 회사일과 가정일로 소일하는 데에 파묻혀 있다.
그러나 내 안에는 타인처럼 느껴지는 본능적인 내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나와 내 주위 사람들과 동물과 사물에게 청진기 같은 더듬이를 들이대고 있다. 늘 관찰하고 느끼고 두려워하고 증오하고 갈망한다. 특히 폭력에 대해서는 성감대처럼 예민하다.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이 감지하는 것을 받아 적는 일이며 그것들이 내 안에서 충분히 익을 수 있도록 그리고 적기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컨디션을 조절하는 일이며, 충분하게 언어에 스며들도록 퇴고하는 일이다. 또는 그러한 것들이 자연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성급하게 작위적으로 쓰거나 또는 지금까지 습득한 손기술을 사용하여 관성적으로 쓰는 것을 경계하는 일이다.
(『실천문학』, 1996년 봄호)
'문학 참고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없어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0) | 2015.03.22 |
|---|---|
| [서평] 강인한 시집 『입술』 (0) | 2015.03.21 |
| '미래파 논쟁' 뛰어든 <서정과 현실> (0) | 2015.03.19 |
| 장정일의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감상 / 허수경 (0) | 2015.03.18 |
| 강인한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단평 / 최 준 (0) | 2015.03.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