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파즈빌 통신
강 인 한
주방의 쪽창에 비치는 풍경이 덜컹거린다
토파즈빌 114동과 토파즈빌 115동
저 두 개의 건물 사이 옹색한 얼굴로 산이 끼여 있고
직사각형으로 잘려진 사계가 지나간다
나는 설거지하는 아내의 어깨 너머로
눈 내리는 겨울을 보았고
색맹검사표같이 어지러운 눈발 속
모든 새의 이륙과 착륙이 금지된 것을 알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느티나무가 내려다보는 놀이터에
그네가 매 맞는 나무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빗속에 승용차에서 내려 얼른 아파트 현관으로 뛰어가는
여자의 품안에 개가 안겨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토파즈빌 114동에서도 115동에서도
비가 오거나 말거나 열심히
고가사다리차가 이삿짐을 실어 내리고, 실어 올렸다
오고 가는 것이 무상하고 유수와 같았다
절뚝거리며 벚꽃이 날리는 것이 보였고 그래서
설거지하는 아내의 등뒤에서
푸짐한 허리를 가만히 안아보다가
저리 비켜, 발부리에 채인 강아지처럼 나는
유순하게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황사와 함께 돼지독감이 입국하는 건 시간문제라는데
내가 사는 토파즈빌 113동의 주방 쪽창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뒤 유유히 외출하는 여자가 보였다
하릴없이 나는 풍경을 갈아 끼운다, 잔뜩 근엄한
최고통치자의 지당한 유시가 웬일로 코미디 대본으로
착각되는 때가 많은 환절기였다.
―『문학의 문학』2009년 여름호
허울만 보석인 아파트
아파트라는 주거환경이 우리 삶을 참 편리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던가, 그 대신에 잃어버린 것도 적지 않다. 자연림을 대신하여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숲을 이루고 물리적 거리는 더 가까워졌지만 정작 이웃다운 이웃은 없는 채 집집마다 고립되어 사는 것을 무엇보다 가장 큰 손실로 꼽아야 할 것이다. 어디 겉만 그런가. 이 시를 읽으면 아파트 생활로 인하여, 또는 세태 변화로 인하여 부정적으로 변화된 많은 것들을 실감한다.
“나”는 갇혀 있는 듯 “쪽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고 그의 눈에 들어오는 자연은 하나같이 불완전하다. 건물 사이에 끼여 있는 산, 직사각형으로 잘린 사계, 눈발 속에서는 모든 새(꿈)의 이착륙이 금지되어 있고, 비 오는 날엔 그네가 “매 맞는 나무”처럼 보이며, 봄에는 절뚝거리며 벚꽃이 날리는가 하면, 황사와 함께 돼지독감이 입국하는 건 시간문제인 세상이다.
그런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가. 개는 “여자의 품안에” 안겨 개팔자 상팔자라는 옛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점점 신분이 상승하는데 비해 “나”는 개만도 못한 사나운 팔자로 전락했다. 그래서 하릴없이 이런저런 풍경이나 갈아 끼우며 유수같이 흐르는 허망한 세월이나 읽어낸다. 시절만 자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태도 빠르게 변한다. 옛날에는 적어도 한 10년 정도는 되어야 강산이 변하는 것으로 알았만, 이제는 계절이 바뀌듯 세상물정이 급변한다. 시인이 표현한 “환절기”라는 의미는 아마도 그런 급변하는 세상과 그에 따라 점점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해가는 중년 남성의 짙은 고독을 암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아파트 속의 풍경은 쓸쓸하기 짝이 없는데 그 아파트의 이름은 “토파즈빌”이다. 말하자면 이름만 허울 좋은 보석일 뿐 속은 전혀 딴판이다. 그런 아이러니한 현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아파트로 모여드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스갯소리로, 시어머니 찾아오시기 어렵게 하려고 아파트 이름을 외국어로 길게 짓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아파트란 참으로 非情의 결정체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이런 방향으로 빠르게 변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왜 시인들만 이렇게 유독 답답해하고 아파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詩로 여는 세상』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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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 1954년 경북 상주 출생. 1982년 월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대표 작품집으로 『금환식』,『그림자도 버리고』,『그리운 아버지』, 『웅덩이를 파다』 등.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한국 시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詩로 여는 세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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