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시로 여는 세상》신인상 당선작 _ 정운희, 이은화
-- 심사위원 : 유안진, 이명수, 홍일표
불안에 관한 보고서 외 2편
정운희
1
눈앞에서 마지막 열차를 놓쳤다.
순간 지상의 모든 길들이 휘발된다. 칼에 베인 듯한 이 서늘한 메타포는 뭘까, 공포에 가까운 긴장으로 열리는 몸, 방전된 가랑이 속 번개가 내리친다. 수억만 개의 유성이 휘몰아친다. 나는 열리면서 동시에 해체된다 낯선 광장, 주머니 칼 잡히듯 펴지지 않는 몸, 살을 발라낸 뼈의 철로
2
꿈속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꼬이거나 솟아 있다
구름은 구름을 올라타고 흔들어대고 휘저어댄다 한 발자국도 집을 향해 진행하지 못한다. 어둠은 두께를 더하며 조여 온다. 다닥다닥 공격해오는 불가사리 그 붉은 별자리 나의 깊은 곳을 빨아댄다 번개가 가차 없이 내리친다. 나는 굴속을 후벼 파느라 손톱이 잘려나가고
불안은 오르가즘의 창고다. 번개는 불안을 공격한다 불안의 절정에서 난 오르가즘을 느낀다. 번개 맞은 동굴이 아득해진다. 불안은 불안을 지켜내는 중독성 강한 毒이면서 눈물이다. 불안의 힘이 나를 키운다. 이 보고서는 대필도 복사본은 더더욱 아닌 리얼리티다
3
나는 너를 주어진 시간 안에 풀어야 한다.
수억만 개의 별자리를 풀어야 하고 수억만 번 하늘과 땅이 열리고 닫힌다. 공격적인 종소리는 불안을 부추긴다. 나는 끝내 너를 풀지 못한 채 점 점 높이 가벼워진다 불안에서 꽃이 피는 기이한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번개는 종소리를 관통하고 종소리는 나의 깊은 곳에서 소리친다. 하늘이여! 바다여! 살쾡이여!
볼트와 너트
볼트와 너트란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내자
너라는 이름의 모든 벽이 참 따듯해졌다
태초의 말씀을 타고 어둡고 환한 빛이 여러 날 번갈아가며 흘러들었다 나라는 이름의 문을 열기 위해 한 평생을 달그락거렸다 누군가 이따금 그 문을 열어 몸의 방향을 바꿔놓았으며 계절을 바꾸고 노아의 방주에 선택된 암수 동물 한 쌍처럼 소리들이 자랐으며 먼지와 바람이 들락거렸다 서로가 서로의 심장을 마주보며 평생을 서서 늙어가는 나무도 있다 볼트와 너트는 각기 다른 자궁에서 태어났으나
부드럽게 접근할수록 강하게 완성된다 집중적이지만 공격적이지는 않다 손끝에 숨겨 놓은 길을 신중하게 감지해야 한다 천기를 누설해도 안되며 불온한 자들을 따돌려야 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깊숙해져야 한다 차갑고 단단할수록 아이는 따듯하게 늙어갈 사랑을 낳을 것이다 내가 너를 이토록 원하고 있으므로 가까이 더 가까이 깊숙이 더 깊숙이 끝장을 봐야 한다
볼트와 너트란 말을 입 안으로 밀어 넣자
세상의 모든 벽이 혀끝에서 사라졌다
데칼코마니
호수에 빠진 달 하나가 물끄러미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네
익룡의 꿈이거나 동그랗게 비행하는 헛것으로
꿈속에서 꿈을 건너다보듯
꽃이 꽃을 퍼가듯 하얀 종이 위에
있는 나를 꺼내어 접었다 펼치면
익룡의 날개가 하나씩 진화한다
나는 너를 빠져나오면서 잠시,
나는 네가 아닌 듯
거울 앞에 선 여자가 자꾸 이별한다
착하게 벗은 몸을 환하게 내걸었으며
달이 핀 창문이 흘러내린다
오늘은 다른 계절이 피는 날
바람 한 송이 가랑이 속에서 저문다
약속이 없이 이곳에 있는 여자를 기다리는
익숙한 밤이 밤의 다른 손을 잡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내 속엔 꿈꾸는 익룡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 속에서 깨어나는 예쁜 새 한 마리 있다
그곳에 다정한 파문이 일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다시 접힐 듯
왼쪽과 오른쪽 저녁의 모든 구름이 사라지면
ㅡ《詩로 여는 세상》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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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희 : 충북 충주 출생. 2010년《詩로 여는 세상》봄호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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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인쇄소 외 2편
이은화
무궁화호가 숨을 덜컹거리며 달린다
어디로 갔다 돌아오는 걸까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물끄러미 창밖을 쳐다보는 여자
마지막 노래가 끝나면 다시 재생되는
영원히 떠나지 못해
유리 한 장에 염소처럼 말뚝 묶인 얼굴
울음과 경적이 두 뿔, 레일
마음이 유리에 뜬다
이렇게 뜨거운 인쇄소가 어디 있겠는가
유리창 하나에 현상되는 인생
칸마다 같은 얼굴만 찍히는
이런 원고지 칸이 어디 있겠는가
어둠과 밝음이 경계를 넘나드는 화면
숨을 덜컹거리며 내 마음을 찍어대는
유리 인쇄기 한 장
굴러가는 바퀴
불꽃 튀기며 순간이 용접되는 길
독자가 오직 자신뿐인 책을 계속 찍어대는
꿈 한 페이지
어머니가 뒤주 속에서 뱀을 들어올렸다
손에 움켜 쥔 뱀 꿈틀거리고
비바람 몰아치듯 하늘은 꾸물거렸다
나는 뱀이 무서워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에 박힌 옹이를 따라 그려보다
마당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붙들어 앉히고
머리칼에 색실을 엮듯 뱀을 엮어
머리를 땋아 내렸다
기둥에 걸린 거울 속
창백한 달
정수리 위 꼿꼿이 선 뱀 대가리
땋아 내린 머리가 하리를 감으며 조여들었다
어머니 뒤주 속은 뱀들의 천국
나는 어머니의 우글거리는 근심 안에서
무릎 연골이 차고 키가 자랐다
뱀 득실대는 세상, 뱀의 지혜를 배워야
머리 물리지 않는다는
어머니 환청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서른하나, 살아오며 물린 뒤꿈치를 본다
뿌리처럼 사방으로 뻗은 뱀들과
보랏빛으로 익어가는 無花果와
꽃피는 시절 없이 지나온 오늘
내 키는 더 자랄 것 없는
지금도, 낡지 않은 그림책 한 장 선명하다
홍씨와 탁씨
웜메, 고약헝 거. 자네 밥 냅두고 왜 놈의 밥을 묵는 당가
워따, 참말로 생사람 잡아불구만, 나는 내 밥 묵었단 말시
내 참! 눈구녕 뒀다 어따 쓸라고, 놈의 밥을 묵고 난리여
자네야말로 눈구녕 빼서 개한테나 줘불소
먼소리여! 나가 개눈깔 박아불었는가안. 그래도 눈두덩 만지문 수북한 것이 영판 좋당께
염병! 오죽 좋겄네. 그나저나 밥알 튕게 말 좀 살살 하소. 이놈의 밥알은 별시럽게 끈끈하고 지랄이여
어이, 탁씨. 그라지 말고 사람 불렀으믄 쌈 한 번 싸줘 보소. 지 입에다간 허천나게 쑤셔넣문서
병신, 자넨 손이 없당가 발이 없당가. 싸게 입 벌리게
워따! 안 주고 뭐한가. 맘보가 그 모냥잉게 눈꼬락서니가 그라제. 말 인심만 살아갔고잉
사람, 성질머리 급하긴. 더듬는 것이 다 구멍이고 허방이랑께
ㅡ《詩로 여는 세상》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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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화 : 1969년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9 김유정기억하기 시부문 대상 수상 . 2010년《詩로 여는 세상》봄호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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