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꽃
한가야
밤 길
꽃밭을 달린다
확확 다가오는 불 켜진 꽃들
빨리 미끄러지는 붉은 꽃들의 옷자락
해라바기는 길게 두 줄로 늘어서 불 켜진 채 고개 숙이고 있다
밤이면
꽃이 켜진다
등으로 피어난다
저 강물에 몸 담그면
내 몸도 불 켜질 것인가
나도 으르렁거릴 것인가
어둠에 달려드는 꽃들의 이빨
신음하는 강물에 몸 담그고
간다
훨훨 비명으로 간다
뻐끔뻐끔 어둠을 마시며
날아간다
미끄러져 간다
헤엄쳐 간다
황홀하게 이어지는 꽃밭에
눈멀어 간다
이불
옥상에서 이불을 걷어온다
내가 이불을 안았는데
어느새 이불이 나를 안고 있다
이렇게 안아주는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아기를 가만히 안아본다
모서리에 찔린 것 같던 아이는
곧 엄마의 뱃속에 있는 것처럼 잠잠해진다
두 팔로 자궁의 모양을 만드는 것
달은 둥글게 익는다
마침내 달은 둥근 달을 안는다
둥글게 모여 앉으면
시선으로 서로를 안는 법
떨어져 나온 기억은 모서리를 갖는다
모서리의 끝에는 바람이 분다
그래서 이불은 필요하다
밤마다 모서리에 서 있는 꿈을
이불은 안아 준다
안아주는 본성으로 태어난 것들
얼마나 눈빛으로 자주 안아 주었던가
그 때마다 마음은 둥글게 익어갔다
언젠가 마음이 둥근 마음을 안으리라
문득 지구가 시계라고 말했다
나는 시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나무로 우상을 만들었으나 나는 정교한 쇳조각을 끼우고 맞추어서 위대한 신을 탄생시킨다. 내 손으로 만든 시계는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 즉 시간을 센다 …… 시계는 시간을 읽는다 …… 시계는 모래알이 뜨거워지는 속도를 읽는다 …… 시계는 심장의 전체 박동수와 현재까지의 박동수를 비교한다 …… 시계는 한 문명의 탄생과 소멸을 잰다 …… 시계는 신의 수명을 잰다 …… 시계는 가끔 괄호를 묶는다. 괄호 안에는 사……랑이 목소리가 잠겨 쉬고 있다 …… 문득 지구가 시계라고 말한다 …… 나는 시계를 만들고 시계는 내 운명을 짤깍거리며 읽기 시작한다 ……
나는 동물원에 간다.
열선이 깔린 바닥에서 뒹구는 오랑우탄을 향해
시계를 던진다.
오랑우탄은 천천히 다가와
시……간을
해체한다.
아침이 되기까지
밤은 강으로 이루어진다
낮의 분주했던 기억들을 쓸어가는 강물
꿈마다 출렁거리며 눈물을 훑어 내린다
밤에 깨어있는 자들은 뼈까지 강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것을 쓸쓸하다라고 표현해왔다
치명적인 이별은 밤에 이루어진다
깨어 있었던 것이 잘못이다
밤의 강물에 머리를 적시는 것이 마땅한 것
그러나 밤의 강물 위로 뻐끔거리며 떠오르는 자음들
나는 자음의 입질을 기다리며 낚시대를 드리운다
뼈까지 출렁이는 강물 속에서
휘청이며 물어오는 자음의 힘찬 펄떡거림을 본다
내 안에서 자라는 모음
그렇게 밤은 잉태를 이루어낸다
밤의 물이 빠지고 아침의 뭍이 드러날 때
쓸쓸한 자들은 더 이상 쓸쓸하지 않으리라
눈물 없는 아침
사람들은 웃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긴 숨을 토해내는 자는
이 밤을 잘 견딘 것이다
심사평
동일시 소외의 상상력
시와 세계 전반기 신인상 수상자로 한가야의 '무서운 꽃' 외 4편을 선정했다. 그가 노래하는 것은 '악의 꽃'이 아니라 '무서운 꽃'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공포를 노래하고, 이런 시상을 최초로 노래한다. 그러나 한가야는 '무서운 꽃'에서 공포를 노래하고, 이런 시는 李箱의 계보에 들고, 그만큼 미적 현대성을 획득한다. 그러지 않은가? 아직도 전통 서정시들이 판을 치고, 꽃에서 아름다운 영혼이니 무슨 향기니 순수니 하며 전근대적인 미학을 고수하는 시들이 많은 우리 시단에 이렇게 꽃에서 공포를 읽는 신인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도대체 그는 왜 꽃이 무서운 것인가? 한 마디로 그건 그가 자아와 대상(꽃)의 동일시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자아가 하나의 전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내가 동일시되어야 하고, 이런 동일시에 의해 최초의 자아, 그러니까 상상계의 가아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대상은 거울이다. 그러나 한가야는 이런 동일시에 실패하고, 동일시 소외를 앓는다. 꽃이 무서운 것은 그가 꽃의 시선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밤에 '확확 다가오는 불켜진 꽃들'을 보고 '어둠에 달려드는 꽃들의 이빨'을 본다. 그렇다면 이런 공포에서 벗어날 방법은 '뻐끔뻐끔 어둠을 마시며 날아가거나', '신음하는 강물에 몸 담그고' 가거나 '나를 안아주는 이불' 같은 둥근 마음을 깨닫는 길이다. 우리는 그가 '둥글게 익어가는 마음'을 배우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이승훈(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송준영(시인,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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