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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그리움의 빛깔, 반짝이는 두 편의 詩 / 박완호 계간문예지 <통> 창간호

by 솔 체 2015. 4. 14.

계간문예지 <통> 창간호

- 이 계절의 시 읽기

 

▣ 그리움의 빛깔, 반짝이는 두 편의 詩

 

- 권현형, 「돌에 분홍물 스밀 때」(『현대시학』9월호)

- 서안나, 「푸른빛으로 기울다」(『현대문학』9월호)

 

 

돌에 분홍물 스밀 때

                                                권 현 형

 

 

 

 

돌에 분홍물 스미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바위틈마다 연달래가 피어

바위가 더 응달져 보였다 차가워 보였다

손이 닿는다면 오뉴월인데도 손이 시릴 것이다

 

문득, 느닷없이, 불현듯

함께 보았던 꽃이 함께 지나갔던 길이

얼굴처럼 생각날 때가 있다

누군가 내 얼굴을, 얼굴 대신

길이나 꽃을 떠올릴 때가 있을 것이다

 

단지 그 길, 그 연달래, 그 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길이나 꽃이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을 때도 있다

조금 덜 길고 조금 덜 향기롭고

조금 더 뜨거운 혀나 손이 되었더라면

 

그러나 뜨거운 건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다

생각만으로 속이 시리다

돌에 스민 분홍을 어찌 뺄 것인가

 

문득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누구’라는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입술 언저리를 가볍게 떨리게 만드는 이름. 해묵은 기억의 갈피에서 불현듯 고개를 쳐드는 그리움이 있다. 그리움은 누군가에게는 노랗거나 붉은 빛깔로, 누군가에게는 파랗거나 하얀 빛깔로 마음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인다. 사십 대의 중반을 나란히 건너고 있는 두 시인의, 그리움의 빛깔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들을 읽으며 나는 내 삶을 물들인 그리움의 빛깔들을 되새겨 본다.

 

권현형 시인은 분홍빛의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 평범한 듯싶으면서도 인상적인, “문득, 느닷없이, 불현듯 / 함께 보았던 꽃이 함께 지나갔던 길이 / 얼굴처럼 생각날 때가 있다”라는 표현을 읽는 동안 나는 시인의 숨결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간다.

오랜 시간이 흘러 더 이상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도, 예전에 함께 걸었던 수많은 길들(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던 눈 내리는 밤길, 벚꽃이 눈발처럼 나부끼던 무심천변의 작은 길들, 학교 담장을 따라 나 있는 좁은 골목길……),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들려주었던 시와 노래들이 이따금씩 예고 없이 새록새록 되살아온다.

시간은 사랑의 기억을 진달래의 붉은 빛이 아니라 연달래의 분홍빛으로 수놓았다. 그래서일까? “돌에 분홍물 스미는 걸 지켜보”는 시인의 눈길은 오히려 담담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붉고 뜨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랑을 떠올리는 것은 낯 뜨거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불혹을 훌쩍 넘긴 시인은 진작 깨달은 듯하다. 한때는 뜨거웠을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시인의 태도는, 그리움을 다룬 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단단한 구조의 작품을 낳는다. 누구나 본받을 만한 덕목이다.

 

“…… 그 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 길이나 꽃이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을 때도 있다 …… // 그러나 뜨거운 건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다 ……”

 

그리움은 “생각만으로도 속이 시리”지만, 시린 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추억이기에 갖는 아름다움이다. 그 때,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지우는 일이다. 가끔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려오는 이름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사는 것도 즐겁지 않은가? 새빨간 빛깔이 아니라 “돌에 스민 분홍”같은 마음 말이다. 무슨 까닭인지, “돌에 스민 분홍을 어찌 뺄 것인가”하는 마지막 구절이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푸른빛으로 기울어지다

                                                  서 안 나

 

 

 

 

쓸쓸하게 읊조리다 다물어 버리는 입술

외로운 것들은 꺾이지 않고 휘어진다고 누군가 말했다

제 마음속으로 식은 등을 돌리는

나는, 당신은

 

휘어지고 휘어져 슬픔의 뿌리에 닿아

활시위같이 팽팽한

나는, 당신은

 

밤새워 걷고 걸어 당도한 새벽

마음을 벗어나려는 지친 발자국들

이것은 찬란한 몸의 반란

함부로 저어놓은 페인트통처럼

나는 봄에서 여름으로 설레인다

 

가다 말고 망설이던 뒷모습을 기억하지

그는 끝내 돌아서지 않아

기다림 끝에서 얼굴을 숙이는 쓸쓸한 어깨

나는 가을에서 겨울로 기운다

 

당신은 전생부터 어깨 한쪽에 메고 온

쓸쓸한 기타 한 곡조

당신을 튕기면

푸른 빛 속으로 흩어지는 새벽의 곡조들

그곳은 사랑의 심연

한없이 퍼져가는 당신

 

나는 푸른빛으로 기울어진다

♣ ♣

 

권현형 시인이 “돌에 스미는 분홍물”을 지켜보고 있을 때, 서안나 시인은 누군가와 함께 부르던 노래를 떠올리며(?) ‘푸른빛’으로 한없이 기울고 있다. 그 때, 그 시절로부터 약간은 멀리 떨어져 앉은 「돌에 분홍물 스밀 때」와는 달리, 「푸른빛으로 기울다」에는 그 시절의 휘몰아치는 격정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누군가와 나란히 밤을 새워 걸어본 적 있다면. 겨울밤 눈 내리는 플라타너스 길 위에서 함께 시를 외우고, 노래를 불러가며 서로를 나눠본 적이 있다면. 때로 눈물짓고, 때로 웃어가며, 그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추억을 안고 살아가게 되리라. 밤새 눈길을 걸어 다다른 새벽, 교회의 난롯가에 앉아 그 날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이 시를 읽으며 나는 그 겨울의 새벽으로 돌아가 그의 옆에 앉는다.

“제 마음 속으로 식은 등을 돌리는”, “휘어지고 휘어져 슬픔의 뿌리에 닿아 / 활시위 같이 팽팽”한 ‘나’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얼마나 외로운 존재들인가? 그러나 진정으로 “외로운 것들은 꺾이지 않고 휘어”지는 법. 그 시절 “함부로 저어놓은 페인트 통처럼 / 봄에서 여름으로 설레이”던 나는 이제 “끝내 돌아서지 않는” 그에 대한 기다림의 끝에서 쓸쓸하게 “가을에서 겨울로” 기운다. 내가 “전생부터 어깨 한쪽에 메고 온 / 쓸쓸한 기타 한 곡조”인 당신은 “푸른 빛 속으로 흩어지”며, “사랑의 심연”으로 한없이 퍼져만 간다.

이 시는 자유로운 시인의 영혼이 꿈꾸는‘찬란한 몸의 반란’을 담은 한 폭의 추상화가 되어, 사랑을 깨닫는 찰나 주체할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한 마음이 그대로 담긴 노래가 되어, 한순간에 읽는 이의 눈과 귀를 파고든다.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어깨를 숙이는 사람의 모습에서도 이별의 슬픔을 뛰어넘은 설렘이 느껴진다.

사랑을 잃은 이는 늘 겨울 한가운데 서 있다. 그러나 인생에는 언젠가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오는 것. 사랑의 심연으로 “한없이 퍼져가는 당신”을 향해 나는 지금“푸른빛”으로 기울어진다. 이 시를 읽는 동안 나는 해묵은 노래 하나를 줄곧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 시간의 행간을 거슬러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한 사람의 귓가에 가 닿기를 꿈꾸며.

 

삶은 어느덧 사십 대의 한가운데를 지나 빠져나올 수 없는 중년의 늪으로 내닫는 중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추억에 온몸을 기대기에는 아직은 너무 젊은 나이다. 그러나 추억이 없다면, 그리움이 없다면 앞으로 걸어가야 할 사막의 막막함을 어떻게 건너랴. 그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꽂혀 있는 사진첩을 열고 그와의 달콤했던 한 때를 떠올리며 되새김질해도 좋으리라. 추억에는 닳아가는 사랑의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그리운 이여, 그 힘으로 나는 언제나 그대를 꿈꾼다. (박완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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