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신 인 문 학 상

2011년 제5회 《시인시각》신인상 ㅡ 홍순영 /김은후

by 솔 체 2015. 5. 9.

우리, 풀밭 위의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외 4편 )

  

    홍순영

 

 

  마지막 고해는 6개월 전이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못 본 것은 수십 년이군요)

 

  고해소 앞에 서서 한동안 들추지 않던 마음 갈피 뒤적이는데, 앞사람 손에 들린 두터운 ‘協商論’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죄의 목록들 나의 신은 칸막이 뒤에 숨어있고, 내 죄는 아직 실존 중인데 지루함에 몸 비틀며 창조론 애통해할 그의 얼굴 궁금하다 주석처럼 매달린 변명 뒤에 감추고 문을 열려는 찰나, 십자가의 힘을 빌려 부디 성공하라는 눈빛 건네는 책표지. 한 평도 안 되는 고해소 안에서 팽팽 머리를 굴려본다 나의 뇌가 칸막이를 밀쳐낼 듯 부풀고 다리는 점점 오그라든다 나는 진화하는 중일까?

 

  그런데 당신, 제가 보이긴 하나요? 고해소를 풀밭으로 꺼내는 건 어떨까요? 저는 소심해서 당신 눈을 보며 고백하진 못해요 예쁜 파라솔 쓴 채 간단히 고해하고, 무릎에 건조한 보속**의 장미 떨어뜨리면, 당신은 그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실건가요? 같이 풀밭 위의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아님, 죄가 남긴 우묵한 그림자를 무릎으로 지우며 제가 건너갈까요? 아참, 제 무릎은 이미 이천년 전에 닳았는데 어쩌죠? 

 

*마네의 그림 제목

**보속: 가톨릭에서 지은 죄를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말 키우기

 

 

오늘 난 예쁜 말 한 마리 선물 받았어

부드러운 갈기와 긴 속눈썹

잘 생긴 이빨과 곧게 뻗은 다리를 가진,

말이 자유롭게 달릴 때

그를 좇아 부드럽게 흔들리는 저 풀들을 보아

풀들은 말을 사랑하지

바람도 말을 사랑하지

그 속에서 거대해지는 말

 

나의 마구간엔, 수십 년씩 키운 말들도 있고

그 속에서 갓 태어난 말도 있지만

대부분 늙어 편자는 닳고

가끔 헛발질하며 절뚝거리는,

혹은, 갇혀만 있어 제대로 뛸 수도 없는

그런 말들 투성이야

그래선지 선물 받은 이 말에게 나는 끌려

 

나의 말은 한때

초원 위를 달리기도 하고

사막 위를 무심히 걷기도 했어

때론 트랑고 빙벽에 아끼던 말을 묻은 적도 있지

나를 태우고 봄바람이거나, 모래바람이거나,

눈보라가 되기도 하던 말들

 

당신,

침묵이 참다참다 토해내는 하얀 입김 속

형태를 드러내는 저 말 한 마리

같이 키워보지 않을래요

 

 

 뼈를 세우다

 

 

  지금 바다를 우려내고 있어 고래와 상어, 청어가 끓는 바다를 맛보려 하는 중이야 내가 방심한 사이 멸치 떼를 몰고 가던 파도 한 채 끓어올랐지 냄비 위로 파닥파닥, 작은 은빛 파도가 꼬리를 쳤어 힘이 없고 작은 것들은 떼로 몰려다니지 어떻게 이 작은 것들이 뼈를 세우는지 몰라 나도 휘어진 내면의 등뼈 세우고 싶었어

 

  몸 속 굳은 내장과 라면처럼 꼬들꼬들한 상념 떼어내는 순간 당신도 허옇게 뒤집힌 그의 눈을 보게 될지도 몰라 물결을 놓치면서 눈 감아버린 그를, 졸지에 떼죽음 당한 무리 속 그를, 어쩌면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겠지 은빛 배와 검은 등줄기 가로지르는 뼈는 그냥 놔두는 것이 좋아 안으로 숨어버린 그의 까만 눈동자가 몸속을 뒤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의 많은 이야기는 가늘고 마른 뼛속에서 우러나오지 멸치를 통째로 씹어 먹을 때 살짝, 혀를 찌르며 씹히는 뼈의 말도 맛있지만 오래오래 끓여보는 거야 비린내도 흐물흐물, 뼈도 물컹해질 때까지

 

  내 휘어진 뼈가 점차 일어서고 있어

 

 

모자의 어깨

 

 

위에서 아래로 쓰는 모자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직선을 긋게 돼

위에서 아래로, 그 뻣뻣한 형식에 비해

모자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챙의 곡선

수직을 떠받치는 수평의 유연함을 사랑해

물결을 닮은,

동물의 귀를 닮은,

토성의 고리를 닮은.

떨어지는 힘을 부둥켜안으려는

탄력 있는 어깨가 참 따뜻해

 

가끔 지하도 계단에서 뒤집힌 모자를 만나기도 해

그럴 때면 난 물구나무를 서야하나 망설이지

물구나무 선 채 계단을 내려가는 사내 본 적 있어

그의 손이 바닥을 읽어가는 쪽으로

모자가 좇아가려고 해

위를 향해 열린 모자의 어깨가 흔들려

뒤집힌 모자는 수치심을 몰라

무너진 형식 위로 쌓이는 싸늘한 눈빛

무너지는 것의 속도는 예측할 수 없지

저 어깨가 불안해

 

주머니 속 손이 모자 속내를 읽어

어둠이 때론 어둠을 밀치기도 하지

모두들 자신의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바쁜 척 걸어가던 뒷모습을 기억해

그건 나였어

아니, 너 아니었니?

뒤집힌 모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어          

 

 

내 어깨 위의 검은 개

 -슬픔에 관하여

 

 

내 어깨엔 제법 큰, 검은 점 있어요

제발, 성형외과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친절한 짓 하지 마세요

이건 제가 키우는 애완견이랍니다

어느 아티스트가 어깨에 얹고 다니는 고양이 인형과는

본질부터 다르죠

이것은 살아있는 검은 개? 라 할 수 있죠

키운 지는 꽤 오래 되었구요

어느새 이렇게 부쩍 자라났는지

믿지 않으시겠지만, 난 이 녀석을 사랑해요

 

이 녀석은 봄만 되면 내 목을 조르곤 해

그럴 때면 커튼을 쳐줘야 해요

좀체 떨어지지 않으려는 버릇 때문에

무거워진 어깨를 견디기 힘들 때면

가끔씩,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마음 놓고 물어뜯을 미래를 꿈꾸기도 해요

 

한 번도 바닥으로 내려온 적 없고

큰 소리로 운 적 없는 이 녀석을 위해

오늘 저녁엔 ‘죽음과 소녀’**를 틀어놓을까 봐요

성찬을 준비하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들은 식욕을 갖기 마련이죠

기꺼이 내 오른 팔을 한 접시 내놓겠어요

나는 불구가 되겠지만

웃을 수 있어요

내 어깨 위의 검은 개가 스스로 내려올 때까지

나는 계속 춤을 출래요

아, 커튼은 그냥 놔두세요

봄꽃들의 아우성, 너무 환하면

또 다시 내 목을 조를 테니까요

 

*  배수아의 소설 ‘당나귀들’ 소제목 인용

**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

 

---------------------

홍순영 / 인천 출생.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1년 제5회 <시인시각> 신인상으로 등단.

 

 

 

樂器  (외 4편)

 

   김은후

 

 

한 그루 소리에 매인 가지들이 문을 닫고 모든 소리는 사라지는 쪽으로 옮겨 간다

이때 현은 끊어져 있다

 

줄이 끊어진 악기가 벌판에 오래 서 있다

바람이 열리지 않는 소리를 두드리다 돌아가고

전정剪한 가지들 빈 틈마다 음표들이 돋는 봄이 되면

푸른 손들이 현에 달라붙을 것이다

조만간 날아오르는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될 것이다.

 

화두話頭가 방음에 붙어 녹슬어 가고 있다

 

미처 감기지 못한 짧은 탄성이 내는 계절

되돌아오지 못하는 소리를 잘라

귀를 키운다.

공중조율에는 실음이 손끝에서 버려지고

연주가 없는날, 적요한 햇빛만 무음으로 가지를 휘고 있다

현이 돋아나는 날씨

공명이   몰려오는 곳으로 꽃들이 졌다

 

소리가 여럿이 되는 무렵

수십 줄의 현에서 검은 음이 떨어져 넓어질 것이다.

지난 겨울 부러진 가지 들에는 불구의 소리가 있고

단단해진 목질의 내부에

무기 가득한 악보가 길다

 

소리를 모으는 곳은 가지 끝이 제격이지만, 가장 높은 음은 가장 먼저 끊어지기도 하여

흩어지는 곳 또한 가지 끝이 제격이다

 

 

흩어지는 방식

 

 

새의 흔적에 나무들이 긴 회랑처럼 앉아 있다.

 

혼자 타는 나무는 없다.

 

물기가 날아오르며 연기를 흉내 내는 나무들

혼자 날아가는 구름은 없다

여러 개의 방을 거느린 직선의 저택에 숨어 있는 것과 열린 것이 함께 있다

아궁이 저쪽이 꼭 방은 아닐 것이고

울음을 보태는 곳이 꼭 아궁이 앞만도 아닌 것처럼

아직 젖어있는 것들의 흩어지는 방식이지

 

부친의 방들이 타이머 안에서 잘라지고 마르고...

문 저쪽에서 재가 되어 나올 때까지

양쪽의 세상에 마음을 두고 흐느끼다 그치다 연기처럼

내 몸에 첫 불을 밀어 넣을 때를 생각하는 시간

 

제일 뜨거운 곳은 눈일 것이라는 확신.

나무는 어느 방에 불을 키우고 있는지

가장 불붙기 쉬운 잎들은 다 털어버리고 있는 철

그 틈 틈을 열어

구름을 채워 넣고 있는 시간

첫 불 앞에서는 혼자 우는 울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연기는 구름의 흔적이라고 필기된 나무의 그늘 한 장을 오래 보관하고 있다

그곳에서 물의 냄새가 났던가

희고 넓은 연기에다 나도 첫 문장을 적는다.

맨 처음 한 줄,

첫 불 들어가는 빈 방이 있다.

 

 

타워크레인

 

 

잣나무 밑동에 사다리가 걸쳐져 있다.

작년 가을, 이氏 아저씨 마지막 나무에 오른 흔적이다.

흔들리는 공중, 마지막 잡았던 힘

걸어서 내려오라고 누군가 치우지 않은 길이다.

꼭대기에 열매를 달아놓는 습성

사람을 겨냥한 나무의 비책 같다.

 

사다리는 나무의 飛階쯤 될까

신갈에서 용인 가는 어디쯤 중단된 공사장

타워크레인 꼭대기에 승강기가 매달려 있다

자본의 열매가 하나 둘 떨어져 오르내리는 것을 잃은 크레인

이氏 아저씨는 잣나무 밑동쯤에

직립을 거두어들이고

사다리를 비워놓았듯.

 

나뭇가지 물어 나르던 새들 집은 늘 비어있다

半月은 빈 달이 아니듯

나무는 새 열매를 얻어 계절을 채워갈 것이고

높은 곳은 비어있는 때가 많아 空中.

 

지상과 몸 바꾸며

계절의 이름을 만들어냈듯

없는 사람을 따라간 계절은 간절기쯤 될까

누군가 잡고 흔드는 듯 공중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

 

 

뒤늦은 관계

 

 

날아오르지 못한 소리들 틈에 귀를 꽂습니다. 움직이는 것이 늘 소리는 아니었지요. 귀를 넣기 전 벌써 닿아버린 소리 시제를 고칠 겨를이 없습니다.

꽃잎이 깨져

겹겹의 잎들이 날리는 봄날의 허공

모든 색은

깨진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겠지요.

 

 공중에서는 불규칙이 규칙일 수 있습니다. 천둥은 번개 속에서 걸어 나오고 비행운은 소리르 바삐 비행시킵니다. 귀르 움직여야 소리를 잡을 수 있지요.

 

붉은 색깔과 한 얼굴은 서로

안면을 모르는 관계이겠지요.

 

땅에서는 경적 음을 알아차리기 전, 마찰음으로 닿는 때가 많아서 비행운이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슬픔은 스프레이로 뿌려지고

오래 일어나지 않아 지워지갰지요.

 

 

인저리 타임 

 

 

터널 입구, 인저리 타임이 주어진다

후반전까지 무승부, 터널 안에서 치러진 3분

터널 빠져나오는 데는 4분,

승부수는 터널 밖 봄날이었다

잎들이 긴 수액의 터널을 지나서 가지 밖으로 혀를 내밀고 있었다

 

장자의 꿈처럼 지난 가을 터널 지나온 것 같은데

밖은 봄이 되어 있었다

 

산 것을 위한 생석회 분사는 늦가을부터 봄까지 이어졌고

두문불출의 시간은 결국 산 것들을 향한 권면의 시간

그 모두를 건너 오늘 오일장이 섰다

곡식들, 마른 고추들이 지키던 낯익은 좌판에는

이른 봄 것들이 나와 앉아 있다

그 한쪽, 메두즐 각진 모서리마다 겨울 칩거들이 발효되어 있고

팔려나가지 못한 것들이 장 바닥에서 난처한 하루를 계량하고 있다

 

인저리 타임도 끝이 나고, 장날도 저물고

장자의 꿈은 다시 어느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하루를 계량하던 계량법으로 그 꿈을 계량하면

지난 겨울은 가장 긴 터널, 4분이었을까

 

난처한 봄날, 잔설이 어제 묻힌 송아지 얼룩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

 김은후 (본명 김혜숙)/ 1952년 경남 통영 출생. 재림문인협회 회원. 2011년 제5회 <시인시각> 신인상으로 등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