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선의 시 「울며 사과 먹기」평설 / 홍일표
울며 사과 먹기
오명선
윗집에서 일방적으로 보내온 사과상자
이건 사과가 아니다
밤마다 내 잠 속을 콩콩 뛰어다니는 어린 캥거루의 발목
쿵쿵쿵 주방으로 욕실로 돌아다니는 하마의 엉덩이
사과도 아닌 것이 사과 이름표를 달고 사과 흉내를 내며 사과인 척 공손하다
입만 열면 뻔한 변명, 뻣뻣한 반성, 꺾이지 않는 일방통행
고집불통의 이 상자
사과를 내 입에 물리고 밤낮없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결국, 내 숨통을 틀어막을
의뭉스런 빨간 속내를 알면서도 뜯고
이렇게 흉보는 나를 들키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억지춘향으로 뜯는다
캥거루가 하마가 훨훨 새가 되어 날아갈 때까지
내 입과 귀는 진공포장 된다
—《학산문학》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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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재미있는 시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목에 잔뜩 힘을 주고 공소한 관념으로 무장한 시나 재탕 삼탕한 고리타분한 전통 서정시에 질릴 때 마음 비우고 편히 읽을 수 있는 시가 생각나지요. 오탁번의 ‘폭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시여세의 이은화 시인이 쓴 ‘홍 씨와 탁 씨’도 그런 좋은 예에 속하지요.
오명선 시인의 ‘울며 사과 먹기’를 주목해서 읽습니다. 층간소음 문제를 재미있게 그렸네요. 현실에 지나치게 밀착될 때 시는 격앙되거나 경직되지요. 초보의 시쓰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 시인은 아주 재치 있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현상을 묘사했습니다. 고수는 쉽게 칼끝을 보이지 않지요. 요령 있게 치고 빠지는 기술을 잘 아는 것이 시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시인은 그걸 알고 있는 거지요. ‘울며 사과 먹기’라는 제목부터 눈길을 끕니다. 시를 다 읽고 나면 묘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지요. ‘숨통을 틀어막’는 현실, 진공포장되는 입과 귀는 시의 화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요. 그러나 화자는 울며 사과를 먹으면서 온몸으로 고통을 견딥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매양 그러하듯 고통을 끌어안고 갈 수밖에요.
이 시에도 몇 군데 흉볼 곳이 있네요. 2연의 첫 행 ‘입만 열면 뻔한 변명, 뻣뻣한 반성, 꺾이지 않는 일방통행’ 은 버리거나 다른 표현을 찾아봐야 되겠지요. 스스로 감정의 제어가 안 되고 과잉될 때 많은 이들이 이런 실수를 하지요. 3연의 ‘억지춘향으로 뜯는다’도 좀 더 시적 표현에 공을 들였다면 다른 수사가 이 자리에 놓였겠지요. 상투적인 표현은 시에서 독약입니다. 가장 경계해야 될 것 중의 하나지요.
오 시인의 시에서 많은 가능성을 봅니다. 그 가능성을 믿고 다음 시를 기대해봅니다. 7월인데 북악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네요.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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