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숙의 「내 안의 우물」평설 / 홍일표
내 안의 우물
황정숙
발끝을 적시고 심장을 품은 물속에
가만히 두레박줄을 내린다
어떻게 닻줄처럼 팽팽한 길이
저 깊은 우물 속으로
이어져 있었을까
한 두레박 퍼올릴 때마다 푸르게
지나간 것들이 뒤뚱거리며 출렁거린다
퍼낼수록 더 맑아지는 샘,
깊은 허공을 만들며 드러난 길
물길이 머물던 돌 틈에 뿌리내린
이끼가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다
낚싯대를 끌어올릴 때 물비늘 떨어지듯
박힌 돌들을
별로 품은 하늘에 동심원이 퍼진다
두레박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실로폰 소리를 낸다
화음에 맞춰 수면에 퍼져가던 물그림자
그 시간으로 이어진 긴 두레박줄을 흔든다
멱까지 차오른 내 안의 우물물,
날 여기까지 끌어올렸을 어둑살무늬 지도
퉁퉁 불어터진 눈으로 만져본다,
찰랑 허공으로 떨어질 두레박줄 팽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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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지나치게 평면적일 때 시의 울림은 짧고 단발성으로 끝나기 쉽지요. 한손에 모든 걸 다 쥐어주는 시는 밋밋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다가갈수록 눈에 보이지 않던 면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낼 때 시 읽는 맛은 배가 되지요. 황정숙 시인의 ‘내 안의 우물’은 여러 번의 퇴고를 거쳐 다듬어진 시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공을 많이 들인 시지요. 기본기도 탄탄하고 시적 표현 능력도 크게 나무랄 곳이 없습니다. 훌러덩 옷을 벗어던지고 금방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창부 같은 시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요.
시는 쉬운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깔도 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치근덕거리는 사내의 사타구니도 걷어찰 수 있어야 되지요. 이 시에서 ‘우물’은 많이 다루어진 소재입니다. 윤동주, 정호승, 마경덕, 서영처 등이 우물을 소재로 재미 좀 보았지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에서도 ‘우물’은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합니다. ‘우물’은 신화적 상징성을 띠고 있는 사물입니다. 민간 설화에서도 ‘우물’은 재생과 치병의 공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정초마다 우물굿을 할 정도로 우물은 신성한 장소였고, 생명과 정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지요. 제가 좀 어려운 얘기를 하고 있나요. 쉽게 말하겠습니다. ‘우물’은 여성의 자궁입니다. 혹시 김유신 장군 집터에 있는 우물을 보셨는지요. 어둠이 똬리 틀고 있는 영락없는 자궁의 형상입니다. 땅 속에 거꾸로 박힌 첨성대 모양 같기도 하구요. 이렇듯 ‘우물’은 여성적 생명력과 재생의 공간입니다.
황정숙 시인은 그런 우물을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합니다. ‘우물’은 시인의 어두컴컴한 내면이고,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이 들끓는 공간이지요. 그곳에 ‘두레박줄’을 내립니다. 나무꾼과 선녀의 두레박줄을 기억하실 겁니다. 두레박줄은 생명의 줄이지요. 신화 속에서도 두레박줄은 탯줄의 의미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제가 오늘은 자꾸 재미없는 말만 합니다. 그래도 들뢰즈나 가타리 얘기로 머리 지끈거리게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시의 화자는 ‘허공을 만들며 드러난 길’을 만나고, 우물 안 이끼가 세월의 어둠을 빨아들이는 걸 봅니다. ‘박힌 돌을 / 별로 품은 하늘’에서 재생의 삶을 보게 되고, ‘수면에 퍼져가던 물그림자’를 내려다봅니다. 이때 우물은 자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지요. 시적 화자는 내면의 어둑살무늬를 조용히 응시하면서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그리하여 신생의 삶이 반짝이고, 시인은 비로소 ‘내 안의 우물’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지요.
이 시에서 한 가지 흠을 잡자면 ‘퉁퉁 불어터진 눈’ 부분입니다. 시적자아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노출한 이런 표현은 시적 감흥을 반감시키지요. 조금 더 표현에 신경을 썼다라면 다른 시적 진술로 능청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나 황정숙 시인은 시단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인입니다. 이런 소소한 문제야 능히 뛰어넘을 수 있겠지요. 폭염입니다. 오후에는 북한산 계곡에 발 담그고 앉아 새소리, 물소리로 어두운 귀나 씻어볼까 합니다.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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