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의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감상 / 김기택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
최정례
호텔 캘리포니아
한동안 그 노래에 갇혀 흥얼거렸지
콜리타꽃 향기, 희미한 불빛, 내 머리를 만져주듯
한 여자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순간 멀리서 종소리도 울려 왔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는가
대전역 쯤의 플랫폼인 줄 알았는가
호텔 캘리포니아인 줄 알았는가
장마 뒤 길바닥 고인 물에 올챙이
햇빛을 총알처럼 되쏘는 그 속을
미친듯 휘젓고 다니다가
"배추요, 무요, 양파요"
행상의 바퀴가 고인 물 튀기며 지나갈 때
잠시 혼절한 그 때
찬란한 웅덩이, 잠깐의 호텔 캘리포니아
구름 뒤에 천둥소리 아득하게 떨어지고
어떤 춤은 기억되고 어떤 춤은 잊혀지는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너
혼자서 듣고 있지
"어서 오세요, 당신은 이곳의 포로
언제든 떠날 수 있다지만 결코 떠나지 못할 걸요"
한낮의 허공으로 솟구치는
"배추요, 무우요, 양파요오"
그 소리 잊지 못할 걸요
햇빛에 웅덩이 날아가 버리도록
— 시집《레바논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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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요, 무우요, 양파요오” 한낮에 골목에서 들려오는 행상의 소리가 젊은 노래에 취해있던 시인의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쳤군요.
후다닥 깨어보니 머리 희끗한 중년! 주변을 돌아보니 한때 피를 끓이며 노래하고 춤추던 젊음은 올챙이 우글거리는 "찬란한 웅덩이". 장마 뒤 길바닥에 고인 웅덩이 물은 "잠깐의 호텔 캘리포니아".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쳐 삶을 송두리째 휘저은 IMF 외환위기는 그 웅덩이를 지나간 야채 행상의 바퀴. 이 지독한 유머가 우리들이 놓지 못하는 삶의 내용물이랍니다. 이 삶의 웅덩이가 곧 햇볕에 날아가 버린다 해도, 여전히 가슴 뛰는 노래, <호텔 캘리포니아>.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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