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근의 「물방울, 송곳」감상 / 김기택
물방울, 송곳
정병근
이 기억을
모두 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시간이
어찌 지금만일 수 있으리
물방울 맺힌다
한 방향으로만 걸어 온 기억이
마지막 시간을 쥐어짜고 있다
올 데까지 온 기억의 장렬한 최후
결심을 끝낸 물방울이 떨어진다
뒷 물방울이 앞 물방울의 목을 친다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머리통
똑, 똑 … 맨몸을 던져 바위를 뚫는
저 집요한 기억의 송곳
—시집『태양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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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근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불교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2001년 《현대시학》에 「옻나무」 외 9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번개를 치다』『태양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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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고 부드러운 물방울이 어떻게 바위를 뚫는 송곳이 될 수 있을까요?
견딜 수 없이 괴로울 때, 그 괴로움이 지나간 후에도 고통의 기억이 남아 현재를 집요하게 찔러댈 때, 그리하여 그 고통의 뿌리인 몸을 상상 속에서 여러 번 죽일 때, 물방울의 부드러움도 송곳의 날카로움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기억의 송곳은 몸 밖에서 피부를 찌르는 게 아니라 몸 안의 알 수 없는 곳에서 몸 전체를 찔러대지요. 그러므로 시인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하나의 물방울 안에 자신의 모든 고통을 우겨넣고 송곳으로 뾰족하게 벼리는 것입니다. 떨어져 부서지는 물방울과 죽어서 먼지로 흐트러지는 몸의 구조는 결국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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