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강릉, 7번 국도」감상 / 강은교, 고형렬
강릉, 7번 국도
김소연(1967- )
다음 생애에 여기 다시 오면
걸어 들어가요 우리
이 길을 버리고 바다로
넓은 앞치마를 펼치며
누추한 별을 헹구는
나는 파도가 되어
바다 속에 잠긴 오래된
노래가 당신은 되어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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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사랑을 만든다. 그것은 그러나 해질녘 빛과 어둠의 경계를 지우는 '그림자 사랑'이기 쉽다. 혹시 얼마 전 바다로 가는 길 위에 망연자실 서 있은 일은 없으신지? 왜냐하면 파도가 갑자기 환상처럼 보였기 때문에. 김소연 시인은 어떤 산문에서 '당신이 없다는 것이 실재라면 당신을 만나러 간다는 그 자체도 환(幻)이다'고 말한다.
바다로 가는 길 위에서 당신은 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당신은 자꾸 그림자가 된다. 없는 당신이 된다. 당신, 당신, 당신-. 그런데 '없는 당신'을 쓰는 것이 詩가 아닐까? 詩를 쓰는 순간 당신은 없는 길 위에서 살아나리라. 끝없이 존재하려고 하는 부재의, 깊디깊은 욕망에서. 그림자인 이들이여. 한번 실험해보라. 여름은 가장 알맞은 때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모든 詩는 연가를 지향한다. 아니 연가이다. '그림자 당신'을 향하여 끝없이 부르는 연가!
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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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기교가 안 보이는 듯하지만 고도로 내재화된 시편이다. 손을 어디선가 딱 놓아버린 시.
7번 국도는 저 아래 포항에서 시작하여 울진, 삼척을 지나 강릉을 거쳐 속초로 올라가는 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도로.
시인이 넓은 앞치마를 펼치는 모습은 가장 여성적인 풍경을 연출한 것이다. 헌화가의 고장 강릉에서 바다로 들고 싶은 마음이 여기 ‘있다’.
나는 이 시를 경주 출신의 김소연의 대표시로 보았다. 아름답다.
고형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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