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로 공작새를 만든 시인 / 홍일표
와불(臥佛)
신현정
나 운주사에 가서 와불(臥佛)에게로 가서
벌떡 일어나시라고 할 거야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와불이 누우면서 발을 길게 뻗으면서
저만큼 밀쳐낸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아마도 잠버릇 사납게 무심코 내쳤을지도 모를
산 두어 개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 텐데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정말 안 일어나실 거냐고
천 년 내놓으시라
천 년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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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에게서 달의 향기를 맡던 시인이 있었지요. 20년 동안 침묵하다가 생의 마지막 6년여 동안 온몸으로 시를 불사르고 간 신현정! 토끼와 줄행랑을 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엉뚱함과 천진함으로 삶과 죽음의 세계를 가시화하고, 무위(無爲)와 놀다간 신현정 시인은 우리 시단의 보기 드문 희귀한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독특한 시세계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고유한 영역이었고, 유희하듯 어슬렁거리며 삶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시의 촉수로 감지한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시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아주 특이한 맛과 향기였습니다.
「와불」은 운주사의 산마루에 누워있는 부처입니다. 자연 암반에 조각을 한 뒤 일으켜 세우려다가 실패한 것이 와불이지요. 당시 사람들의 실망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리라는 꿈으로 바뀌어 민간 신앙으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신현정 시인은 마치 투정하듯 와불에게 말합니다. 벌떡 일어나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하다못해 무심코 내쳤을 ‘산 두어 개’라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와불은 묵묵부답입니다. 화자는 손짓 발짓 하나 못하고,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는 와불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 와불이 벌떡 일어나 새 세상이 올 것이라는 절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마냥 침묵만 지키고 있는 부처가 시인은 답답했던 것입니다.
화자는 한 발 물러섭니다.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 텐데’ 라면서 이무기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침묵입니다. 마침내 화자는 협박하듯 부처님에게 이무기도 내놓지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할 것 같으면 사람들의 눈물과 애환으로 점철된 지난 ‘천 년’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시인의 으름장에 운주사 와불도 꿈틀 했겠지요.
하느님과 놀던 시인이 여기서는 부처님과 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시인의 친구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아버지입니다. 아주 만만합니다. 부처는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라도 함께 뒹굴며 놀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를 하느님과 부처님의 친구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엉뚱함과 천진함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나지요.
그러나 신현정 시인은 이승에서 많이 놀지 못하고, 토끼와 함께 야반도주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들의 삶이 한결 여유롭고 헐거워졌을 겁니다. 지금쯤 신현정 시인은 공기보다 더 가벼운 몸으로 양평 하늘숲 솔바람과 잘 놀고 계시겠지요. 기차에 토끼의 귀를 달아주고, 무지개를 잡아 공작새를 만들던 그의 솜씨가 그립습니다.
홍일표 〈시인〉
출처 :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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