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의 「누가 사는 것일까」평설 / 홍일표
누가 사는 것일까
김경미
1
약속시간 삼십 분을 지나서 연락된 모두가 모였다 우리는 국화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웃었다 불참한 이도, 더 와야 할 이도 없었다 식사와 담소가 달그락대고 마음들 더욱 당겨 앉는데
문득 고개가 들린다 아무래도 누가 안 온 것 같다 잠깐씩 말 끊길 때마다 꼭 와야 할 사람 안 온 듯 출입문을 본다 나만이 아니다 다들 한번씩 아무래도 누가 덜 온 것 같아, 다 모인 친형제들 같은데, 왜 자꾸 누군가가 빠진 것 같지? 한번씩들 말하며
두 시간쯤이 지났다 여전히 제비꽃들처럼 즐거운데 웃다가 또 문득 입들을 다문다, 아무래도 누가 먼저 일어나 간 것 같아 꼭 있어야 할 누가 서운하게도 먼저 가버려 맥이 조금씩 빠진다
2
누굴까 누가 사는 것일까 늘 안 오거나 있다가 먼저 간 빈자리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그 기척은 기척일 뿐 아무리 해도 볼 수 없는 그들에겐 또 기척일 뿐일까 아무리 다 모여도 언제나 접시의 빠진 이처럼
상실의 기척, 뒤척이는 그들은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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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기척
김경미 시인은 좋은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시 한 편을 골라 보았습니다. 자주 시를 접하지 않는 분들은 이 시조차도 마냥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요. 섬세한 시의 언어와 통사법에 조금만 주목하신다면 이 시를 읽는 것이 그렇게 난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은 남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시로 이야기합니다. 나직한 음성이 존재의 내밀한 숨결을 조용히 불러냅니다. 시인은 어느 모임에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국화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그 동안 적조했던 마음의 거리들을 좁혀갑니다. 어느 새 두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와야 할 누군가가 아직 오직 않은 듯합니다. 꼭 와야 할 사람이, 꼭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오지 않은 듯합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즐거운 시간의 틈새에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너나없이 존재의 상실과 결핍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무 부족함 없이 충만했던 시간이 조금씩 결핍의 미세한 금으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파동이 일기 시작합니다. “자꾸 누군가가 빠진 것 같지?” 그러나 다시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애써 허전한 기척을 가만히 밀어내는 거지요. 밀어낸다고 마음 속 공간이 쉬 채워질 리는 없겠지요. 여전히 제비꽃처럼 즐거운데 어찌된 일인지 맥이 조금씩 빠집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이와 유사한 경험들을 하셨을 겁니다. 마음 속 텅 빈 한 구석, 유난히 넓고 커 보이는 그 곳에 날이 저물고 해가 집니다. 존재는 그렇게 아프기 시작합니다. 자꾸 주위를 둘러보아도 상실감, 결핍감은 메꾸어지지 않습니다. 꽉 찬 듯하던 자리에 난데없이 나타난 빈자리를 어찌해야 하는지요. 우리는 모두 ‘접시의 빠진 이’를 안고 삽니다. 평소에 보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보게 되는, ‘상실의 기척’은 생의 낯선 풍경입니다. 상실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한없이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합니다. 오래 전 잃어버린 것, 그것이 우리를 쓸쓸하게 하고 헛헛하게 합니다. 문득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릅니다. 이 소설은 현대문학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끊임없이 인간의 생명을 허물어 현재를 과거의 어둠 속으로 함몰시켜 가는 <시간>의 걷잡을 수 없는 파괴력에 대한 천착이며, 삶의 무상과 죽음에 대한 관찰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잃어버린 '나’를, 숨어 있는 생명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이 소설의 핵심이지요. 김경미 시인의 이 시는 미세한 떨림으로 다가오는 ‘상실의 기척’을 전하며 존재의 상실감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한 편의 시로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의 섬세한 촉수가 감지하는 ‘상실의 기척’을 느끼셨는지요? 아무리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하여도 존재는 항상 빈틈을 내보입니다. 생명의 비의는 그 빈틈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무상한 삶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허무는 수시로 인간 앞에 나타나 욕망의 무한질주에 제동을 겁니다. 유한한 삶의 고삐를 잡고 고개 숙이게 하고, 잃어버린 삶의 목록을 들추어 보게 합니다. 조금 더 낮은 자세로 길가의 제비꽃들을 들여다봅니다. 조그만 입을 꼬옥 다물고 있던 생명들이 나직한 목소리로 종알거립니다. 길상사 오르는 길가에 오래 전 잃어버렸던 유년의 기억들이 곰실곰실 기어갑니다. 열심히 귀를 기울여 보지만 여전히 속에서 울리는 텅 빈 독, 쉬이 채워지지 않는 봄입니다. ‘접시의 빠진 이’만 선연합니다.
홍일표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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