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문학동네》신인상 당선작_ 최예슬/ 변명(외4편)
심사위원_ 신형철, 이문재, 진은영
변명 (외 4편)
최예슬
이곳 아테네는 혼란스러운 도시입니다 시민들 사이로 회의주의가 유행하고 음유시인 마을은 감수성 과잉입니다 예언가의 말처럼, 고귀한 사람들이 비극적 공동체로 몰락하는 것입니다
나는 살찐 돼지입니다 철학은 모르고 예술은 조금 할 줄 압니다 벽에 윤곽선 그리는 일로 근근이 먹고 살지요 이것은 하늘의 색깔과 우리들의 관계, 공간과 느낌 따위를 붙잡는 일입니다 관공서에 그려진 온갖 윤곽들은 내가 붙여놓은 것이에요 쇠약한 빛, 풍만한 언어, 공간의 명암 알고 싶은 부분만 도려내어 스티커처럼 붙여놓을게요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식사시간을 경멸합니다 겨울과 여름 내내 먼지투성이 외투를 걸치고 광장을 떠도는데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먹지 않고를 반복합니다 야위어가는 영혼을 간신히 붙들고는 네 자신을 알라며 호통을 치던 광경, 도대체 얼마나 헐벗어야 만족할는지요 그의 고집을 못 이긴 예언가들은 광장을 떠나기 시작하고 여벌의 외투와 무도회에서 남겨진 음식을 조금 얻어와도 소크라테스는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신들을 노래하던 자리에 벌거벗은 조각상만 남아 있습니다 아테네 청년들은 나날이 타락하고 시민들의 식사시간은 여전히 즐겁습니다, 불법체류자 마을에는 병을 악화시킨다는 약이 떠돌고 닭 모가지 비틀어오던 주술사들은 신전 앞에서 유령이 되었습니다 신전을 걸어잠근 주정뱅이 문지기는 며칠째 소식이 없어요
사실은 말입니다 우리 돼지들은 아테네에서 가장 회화적이고 음악적입니다 눈을 감아도 뜬눈처럼 밤을 지새우는 예민한 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첩을 꺼내 보이는 감각적인 종족,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동안 눈과 코와 귀를 열렬하게 감각하는 것임을 광장 한가운데서 고백하려 하는데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것보다 죄악인 것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것이라며 고집을 부립니다 자신의 우리에서 기르던 돼지에게 병을 의탁하는 인간이라니,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아니 부끄러운 건 내 마음일까요 그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웅크린 채 한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내가 소크라테스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단지 정기적인 소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작문시간
놀라지 말아요 오늘 숙제는 내가 발표할게요 나는 위대한 천재는 아닙니다 단지 솜씨 있는 발견자입니다 오늘 아침 마술사의 집에서 붉은 발을 가진 외동딸이 태어났어요 외과의사는 외동딸의 발목을 잘라버렸고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할 수 없이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다니기 시작했지요 독학자는 주현절이면 광장 한가운데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댑니다 —사유는 왜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가! 그는 허름한 지성의 겉옷을 뒤적이며 행인들의 답가를 기다렸지만 마을 사람들은 광장의 시계탑을 이리저리 옮겨대며 노래하지 않아요 밑그림을 두 번 세 번 덧칠하는 화가들, 일부러 삐뚤삐뚤한 단면의 세공사들, 지하 골목의 뜨내기들, 도서관을 지키는 문지기와, 기뻐하지 않는 행상인들 그들은 독학자를 이기적인 난봉꾼, 고집쟁이 외동딸로 비난합니다 하늘에서 죽은 쥐떼가 구름에 떠밀려 흘러갑니다 단호한 오월의 날씨에 혁명이란 시민들의 여분의 감정 무너지는 첼로 연주의 음계에서 제국과 인생이 흘러나와요 우리는 모두 재즈클럽의 악사, 당신의 허밍에 마을의 운명이 달린 거죠 (너 같은 빌어먹을 몽상가들 때문에 대도시가 이 모양인 거다!) 쉿, 휘파람도 불지 말아요, 나약한 운명들이 술통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는데 외동딸은 자신에게 부재하는 것이 신념인지 현대식 시민정신인지 알지 못한 채 붉은 말을 돌려받으러 외과의사를 찾아 길을 떠났고
나는 교실 뒤편에서 백조의 목을 힘껏 비틀었습니다* 얇고 긴 목이 산산조각 바스라질 때까지 주홍색 활자들이 뚝뚝 새어나올 때까지
———— * 엔리케 곤살레스 마르티네스, 「백조의 목을 비틀어라」에서 인용.
비밀의 왕국
먼 옛날 비밀이라는 작은 왕국에 일곱 백성이 살고 있었다 유난히 비밀이 많던 거짓말여왕, 일곱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지만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들을 모두 사형할 것을 명령했고…… 이것은 두더지 서기관이 비밀리에 옮겨적은 일곱 백성들의 유언장
귀머거리 시인 고독에 대한 풍문이 들려오면 마을 언덕에 모닥불을 피워주세요. 흉가에서 들썩이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보고 싶어요.
어린이 일기를 쓰는 것은 숙제였으므로 일기장에는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어. 엄마가 죽으면 염소에게 일기장을 먹여야지. (엄마에게는 비밀인데요. 나는 시도 쓸 줄 알아요. 어제도 꿈속에서 엄마가 죽는 시를 썼다구요.)
소심한 혁명가 모두 각자의 리듬으로……
쌍둥이 심장 너와 나의 경계에서 잠들고 싶다 그것은 너도 되고 나도 되는 것. 열렬한 왼편 냉담한 오른편. 웃음이 울음처럼 터지려고 합니다.
원더보이 알바 간신히 스물다섯 번째 스테이지. 동전 몇 푼에 원더보이 노릇도 지긋지긋하군. 좀처럼 판은 깨지지 않고. 빌어먹을 못생긴 공주는 어디에 있길래. 왜 당신의 전략은 늘 그 모양입니까 지겨워 죽겠습니다.
첫 내가 얼마나 서툴렀습니까. 오늘은 어제를 입은 내일과도 같아서 늘상 처음 하는 인사입니다.
그리고 나, 두더지 나의 진실은 거짓말이에요. 당신께 진실해지는 순간 나는 거짓이 되어버리죠. 나의 엄마 거짓말여왕은 내가 왕국에서 가장 진지한 서기관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달라요 나는 왕국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시인입니다.
백성들을 죽이고 왕국에 홀로 남은 거짓말여왕 너무 심심한 나머지 거짓말 놀이를 시작했다 자신은 여왕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여왕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또 거짓말을 낳고…… 결국 자신이 여왕인지 아닌지 헷갈려 광기에 사로잡혀 영원히 비밀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나, 그러니까 나는…… 누구일까
마지막 뮤즈
바다와 나무가 그려진 춤을 추기 위해 빈손으로 떠나왔습니다 세계는 고집스런 사람들이 불행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고 곤궁한 시기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구걸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우리들의 삶은 뒤틀려 있습니다. 오늘도 희극 배우를 꿈꾸는 나의 아버지, 무용한 인생이 전부이고 테이블 위에 올라 반주 없이 스텝을 밟는 여동생의 버릇 당신은 선술집 간이침대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며 한 달을 보냅니다 색채, 감정, 데생이 남용되는 스승의 기보법은 시민들의 기억 속에 구겨진 종이 조각일 뿐이지요 사교계의 볼거리라곤 외줄에 매달린 곡예사의 묘기. 나는 토슈즈 몇 켤레와 연회복을 비싸지 않은 값에 팔아버립니다 한동안 오렌지가 열린 과수원을 달려가는 꿈에 뒤척이고 깨어나면 한 병 술조차 마실 수 없는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겠어요 가난은 열정에 도취된 군중들의 정서입니다. 선과 형상을 빚어넣어 예술가의 본능을 되새기는 귀머거리 화가 음표들이 실종된 악보를 뒤적이는 브라스밴드의 리더 비극적인 코러스에 맞춰 자라나는 우리들의 인스피레이션 자유분방한 음악, 피어나는 미모사,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나의 계절도 우울한 도시생활도 조화로운 동작으로 피어나겠지요. 오랫동안의 투병생활과 향수, 신경쇠약으로 지쳐 있겠지만 당신은 위대한 화가이며 시인이고 조각가이며 극작가입니다 우스꽝스러운 광대극이 끝난 후 시민들은 극장을 떠나갈 테지만 우리가 추었던 그것은 한낱 몸짓이 아닙니다 청춘을 지탱하는 춤의 열망, 춤보다 리드미컬한 당신과 나의 서사, 이별할 때에는 발끝으로 서는 버릇. 당신이 무대에서 혼란과 열정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계의 몰락을 아주 조금 늦추는 나의 작법입니다.
외출
1 수술실 늙은 여의사는 익사한 선인장에게 물을 붓고 있었다 마른 시간으로 호흡하던 얼굴은 검은 선인장으로 옮아가던 중이었고, 그것은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자세
“죽어가는 것들은 불필요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가시가 돋아나는 것은 곤란합니다 관계는 선명해질수록 불행한 거예요 당신의 선인장을 뽑아버리고, 나를 깨끗이 비워주세요 나의 이력은 죽음으로부터 시작하거든요 엄마가 사준 빨간 가방을 힘차게 열고 나왔고 그날부터 운명의 게이지는 조금씩 소모되고 있어요 나는 죽어가는 중입니다 운명을 덜어내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사뿐사뿐 죽음을 낳고 싶어요”
늙은 여의사는 나의 자궁을 벌리다 말고 속삭였다 선인장은 죽지 않았어요 단지 불감증일 뿐이에요
2 죽음으로 달려가는 즐거움의 여자 미처 연애가 즐거운 줄 몰라서 글을 쓰지 못했다 이것은 선인장의 불감증에 대한 화분 여사의 병상일지
사치스런 감정을 신봉하는 늙은 여의사 익사한 선인장을 데려왔고 나의 자궁에는 물컹이는 살덩이가 맺혔다 선인장양은 불감증이었다 불행히도 자신의 선명함을 알지 못했고 죽어간다는 자괴감에 취해 가시를 피우지 않았다 그녀 안에서 돋힌 가시들로 온 내부가 멍이었다고 벙어리 해부학자의 침묵이 전해왔다
3 선인장을 뽑고 빈 화분만 남은 늙은 여의사, 나의 자궁을 벌려 가득 물을 붓다 말고 속삭였다 우리의 배경은 너무 오랫동안 절망이었습니다
—————— ▲ 최예슬 / 198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마로니에여성백일장 장려상. 정보문화대상. 2010년 전국만해백일장 일반부 장원. 현재 이화여대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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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경위〕
2011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549명이 3,284편의 작품을 응모해주셨다. 이를 삼등분해서 세 명의 심사위원이 각자 1차 심사를 진행했다. 세 심사위원들은 각각 세 명에서 여섯 명까지의 응모자를 2차 심사에 올렸고 그 결과 총 열네 명의 작품을 7월 29일에 개최된 최종심에서 검토하게 되었다. 먼저 여섯 명의 작품을 어렵지 않게 추려낼 수 있었다. 그 명단을 표제작 제목을 기준으로 가나다순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공백기」외 7편을 투고한 안희연씨, 「금수회의록」외 6편을 투고 한 공현진씨, 「변명」외 4편을 투고한 최예슬씨, 「아름다운 기형」외 7편을 투고한 황은화씨, 「자폐」외 7편을 투고한 임현씨, 「주머니 이야기」외 5편을 투고한 류진씨. 이 중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인 세 사람은 「변명」외 4편을 투고한 최예슬씨, 「아름다운 기형」외 7편을 투고한 황은화씨, 「자폐」외 7편을 투고한 임현씨,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이 셋을 놓고 한 명의 당선자를 가려내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변명」외 4편을 투고한 최예슬씨를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소중한 작품들을 기꺼이 보내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평 (공통부분 발췌)〕
신형철(문학평론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도달해 있는 작품들 중에서도 기성 시인의 발성법을 은연중에 따라가고 만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우리는 조금씩 사소해지고’와 같은 식의 문형이 시시때때로 출몰하고 ‘이것은 00에 관한 이야기’와 같은 식의 문구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특정 기성 시인들의 화법이 당대의 공유 자산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이문재(시인) 예컨대 응모작 다섯 편을 묶을 때, 작품 순서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맨 뒤나 중간에 있는 응모작이 더 뛰어난 경우가 없지 않다(자기 작품에 대해 스스로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다). 시쓰기의 알고리즘(절차)은 세 단계다. 생각하기-쓰기-고치기. 모든 시가 창의성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모든 시쓰기는 이 세 개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시의 나라에 입국할 수 없다. 내가 문예창작 강의실에서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의 습작기 학생들(일반 시민들도 결코 다르지 않다)이 생각하지 않고 쓴다는 것이다. 또 생각하고 썼다고 하더라도 고치지 않는다. 오로지 쓰기만 있다. 한 편의 시를 쓴 다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라. 아주 냉정하게. “나는 이 시를 쓰기 위해 얼마만큼이나 생각했는가. 이 시를 쓰고 나서 몇 번이나 고쳤는가.” 나는 늘 이렇게 주문한다. 새로운 의미와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면 쓰지 마라. 쓰고 나서, 최소한 열 번 이상 소리내어 읽으며 고치지 않았다면 발표하지 마라. 쓰는 단계가 가장 쉽다. 생각하기가 어렵고, 고치기는 더더욱 어렵다.
진은영(시인) 시를 쓰는 이들에 대해서는 덮어놓고 애정을 느끼는 나쁜 버릇을 감안한다고 해도, 아쉽고 아깝다. 주머니에 담아오지 못한 매우 아까운 당신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단점에 대한 조언들에 귀 기울이긴 해야겠지만, 단점을 고치는 데에만 전력투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단점이 있다는 게 아니라 당신들의 놀라운 장점이 모든 작품에서 흘러넘치지 못했다는 것. 그러니까 자신들의 매력에 더 지독하게 매달리는 것이 좋겠다. 위대한 장점으로 여행자들의 혼을 빼놓으라. 그러면 단점은 조각의 음각처럼 필연적인 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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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심 통과 14명의 작품들》
* 자폐 외 7편 (임현) * 아름다운 기형 외 7편 (황은화) * 변명 외 4편 (최예슬) * 무럭무럭자라세요 외 4편 (백연주) * 금수회의록 외 6편 (공현진) * 굿바이, 후쿠시마 외 7편 (김정현) * 제로의 섬 외 4편 (정지오) * 메텔, 인류는 아데노 바이러스를 사랑했다네 외 4편 (지수) * 슈뢰딩거의 고양이 외 4편 (김상윤) * 루시드 드림 외 5편 (김나나) * 국가의 음모 외 5편 (배철희) * 공백기 외 (안희연) * 주머니 이야기/ 기린 외 (류진) * 아름다운 사랑/ 햄릿 외
이번 《문학동네》신인상 당선자를 정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건 그만큼 걸출한 작품이 없었다는 증거. 당선작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말들을 살펴본다. “그의 미래의 시를 기대하게 만드는 어떤 에너지가 있었다. 표제작에서 ‘사유의 근육’을 감지했다.(신형철)”, “「변명」이 내장하고 있는 미덕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힘’이었다.(이문재)”, “가장 강렬하게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변명」의 당신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처럼 변명하는 시적 화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배부른 돼지’이다. 가볍게 역전된 우화 속에서 시인은 별 비장함 없이 명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진은영)”
—《문학동네》2011년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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